본문 바로가기

[이하경 칼럼] 한국의 정치적 내전…트럼프·히틀러가 어른거린다

중앙일보 2020.11.16 00:41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끝없는 거짓말과 선동으로 전 세계를 뒤흔든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조 바이든에게 패배했다. 많은 사람이 “광인(狂人)의 트위터 놀이, 페이크 뉴스에 농락당하지 않게 됐다”고 안도한다. 미국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성급한 기대다.
 

상처받은 약자들을 방치한 결과가
선동가의 선거 통한 합법적 집권
민생 고통에 두 눈 감은 한국 정치
남북 분단 이어 남남 분열로 가나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라는 미국 소설은 트럼프 현상의 기원을 밝힌 사회학 교과서나 다름없다. 힐빌리는 중부 애팔래치아 산맥에 사는 가난한 백인노동자들의 별명이다. 저자 J D 밴스는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30대 중반의 반듯한 미국인이다. 하지만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의 철강도시 미들턴에서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밴스의 조상들은 날품팔이·소작농·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다. 그는 “엄마는 마약을 사려고 다섯 번째 남편이 상속받은 재산에 손댔다가 집에서 쫓겨났다”며 “내 고향은 오만 가지 불행의 중심지”라고 회상했다. 밴스는 실화를 소설로 쓰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 레드넥(Redneck, 햇볕에 그을려 목이 붉어진 남부의 가난한 농부)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고 부른다”며 연민의 감정을 표시했다.
 
소설은 미합중국 안에 상처받고 모욕받는 사람들의 또 다른 아메리카가 방치돼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장사꾼 트럼프는 영악했다. 그는 2016년 대선 초기에 낙오자들과 자신을 한데 묶어 ‘우리’라는 1인칭 복수대명사를 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 나라에 “우리 광부들” “우리 농부들” “우리 참전 용사들” “우리 근로자들”이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미국은 왜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선택했는가』 빅터 데이비스 핸슨, 김앤김북스). 낙오자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고 부르는 밴스의 공감능력과 만나는 지점이다.
 
지성과 교양을 갖춘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대선 후보 시절 탄광지대인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최악의 실언(失言)을 했다. 그는 “탄광촌에 경제성장의 기회를 마련하는 비결로 청정 재생에너지를 이용할 정책을 제시하는 유일한 후보가 나다. 많은 탄광 광부와 업체가 사라지게 된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에게는 “잘난 내가 네 밥줄을 끊어 놓겠다”는 협박이었다.
 
반면에 트럼프는 이 지역에 대해 “아름다운, 청정 석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아첨성 발언으로 마음을 샀다. 두 사람의 대선 승패를 가른 것은 이런 태도의 차이였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미국 유권자 7300만 명은 이런 트럼프와 자신을 “우리”로 묶어 열렬히 지지했다. 변함없는 콘크리트 지지층은 트럼프가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4년 뒤 대선에 재도전하게 하는 든든한 ‘뒷심’이다.
 
바이든은 평생 개인적 불행과 슬픔을 안고 살았고, “미국을 통합시키겠다”고 했다. 그가 오래도록 방치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까.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인 자난 가네시는 ‘워싱턴의 극심한 당파주의’를 이유로 “국민 통합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은 한세기 동안 세계 질서를 주도해 왔고 민주주의를 수출해 온 일류 국가다. 그런 미국도 빈부격차 해소와 국민통합이라는 내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해 두 개의 국가로 분열돼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이식한 한국은 어떠한가. 가계부채에 신음하는 자영업자, 일자리·소득 감소로 고통을 겪는 비정규직의 삶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쉴새없이 돈을 풀고 있지만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50년 전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면서 분신했다. 그러나 지금도 매년 2000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의 부끄러운 기록이다.
 
정치권은 집권을 위한 권력 투쟁에는 젖먹던 힘까지 내지만 고통받는 민생은 건성으로 챙긴다. 말로만 정의를 부르짖는 강남 좌파,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이기적 노조, 퇴행적 반공 우파가 한통속이다. 진보와 보수, 여와 야를 통합해 국민의 삶을 지켜줄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남과 북으로 찢긴 것도 모자라 이젠 남남 분열로 가려 하는가.
 
선동가 트럼프는 대중의 분노를 무기로 민주주의 장치인 합법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히틀러가 정치적 선배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였다”고 경고한다.
 
한국은 이런 미국보다도 덜 성숙한 나라다. 반세기 전 파리에서 시작해 유럽과 미국·일본을 휩쓸면서 평등과 인권·공동체주의·생태주의의 세례를 선물한 6·8운동은 분단된 한국에는 상륙하지 못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 ‘한국 예외주의’가 이 나라를 세계적 흐름에서 반세기 정도 뒤처지게 했다”고 했다.
 
한국은 정치적 내전 상태다. 보수·진보 두 진영의 정치인들이 각기 자기 편만 바라보면서 상대를 악마화하고 “내가 옳다”고 소리지르고 있다. 민생을 살리고 외교와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대통합, 연대와 협치는 가물가물하다. 한국판 히틀러, 트럼프가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하경 주필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