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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갑질과 부패를 부르는 엉터리 ‘아파트 민주주의’

중앙일보 2020.11.16 00:37 종합 25면 지면보기

아파트 관리소장 피살의 내면을 보다 

국회 앞에서 열린 대한주택관리사협회 간부 삭발 행사. 이 협회는 국회에 주택관리사 보호를 위한 입법을 요구했다. 오종택 기자

국회 앞에서 열린 대한주택관리사협회 간부 삭발 행사. 이 협회는 국회에 주택관리사 보호를 위한 입법을 요구했다. 오종택 기자

삭발식이 열렸다. 병풍처럼 뒤에 선 사람들이 구호를 외쳤다. “주택관리사도 사람이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의 황장전 회장, 이선미 경기도회장, 김학엽 대구시회장의 머리카락이 보도블록 위에 쌓였다.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일이다. 황 회장은 삭발식에 앞서 “이번 사건은 공동주택 입주민을 위해 소임을 다하고 있는 주택관리사에게 가해진 천인공노할 만행이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관리소장 63%가 부당 간섭 경험
주민회장과 동대표가 주로 횡포
“민주주의로 포장된 온갖 부조리
아파트 정치에도 똑같이 등장해”

그가 말한 ‘이번 사건’은 지난달 28일 인천시 J아파트에서 벌어진 참극이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 이모(63)씨가 아파트 관리소장 이경숙(53)씨를 흉기로 찔렀다. 관리소장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바로 숨졌다. 회장 이씨의 범행 모습은 폐쇄회로(CC) TV에 담겼고, 그는 구속됐다. 관리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따르면 그는 아파트 관리비 통장을 자기 단독 명의로 여러 차례 바꿨다. 관리소장이 번번이 이를 바로잡았다. 그때마다 그는 소장에게 폭언을 하며 횡포를 부렸다. 아파트 관리비 통장은 입주자 대표와 관리소장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돼 있다. 법이 그렇다.
 
소장 이씨의 언니는 “동생이 아파트 회장이 자기를 계속 괴롭힌다고 얘기했는데, 어느 직장에나 있는 타인과의 갈등이려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게 후회가 돼 미치겠다”고 말했다. 소장은 미혼이었고, 치매 증상을 보이는 90대 노모를 부양하며 살았다. 언니는 10일 삭발식장에 나왔다. 그는 “아파트에서 일하는 모든 관리사가 터무니없는 갑질 피해를 보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입주민의 재산을 당당하게 지킬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을 향한 주문이다.
 
J아파트에서 만난 주민들은 회장 이씨가 관리소장을 오랫동안 괴롭혔다는 것을, 통장을 혼자 관리하려고 무리한 일까지 벌였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한 주민은 “동대표 중 한 사람이 관리소장이 돈을 빼돌리고 있는 것 같다며 회장의 의심을 계속 부추겼다는 이야기를 사건 뒤에 들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범행 동기는 경찰이 수사 중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그는 트럭 운전을 하며 J아파트에 홀로 거주했다. 관리사협회 인천시회 관계자는 “관리소장에 대한 막연한 의심, 자기 뜻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관리소장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상태에서 주민회장이 이상 행동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주민회장의 관리소장 살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주민회장과 동대표의 관리소장에 대한 ‘갑질’은 비일비재하다. 협회가 공개한 대표적 사례가 50여 개다. 협박·폭행·폭언·업무방해 등 형태가 다양하다. 4년 전 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에서는 주민회장이 관리소장을 ‘종놈’이라고 칭해 형사처분을 받았다. 협회에 따르면 주민회장을 포함한 입주자의 갑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관리소장이 10명(2003년부터 집계)이다. 한국주택관리연구원이 지난해에 낸 보고서를 보면 아파트 관리소장의 63.3%(2018년 418명 설문조사)가 입주자 측의 부당한 간섭을 경험했다. 부당한 행동을 한 사람으로 44.9%가 주민회장을, 13.7%가 동대표를 지목했다. 부당 간섭 경험자 중 절반 이상이 인사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참았다고 응답했다.
 
아파트 관리소장 설문조사

아파트 관리소장 설문조사

주민회장은 관리소장을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다. 대개의 아파트는 관리 전문업체와 계약을 맺는다. 그쪽에서 관리소장을 파견한다. 업체는 주민회장의 관리소장 교체 요구를 무시하기 어렵다. 다음 계약 때 아예 업체를 변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 측과 마찰을 빚은 주택관리사는 업체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곳의 관리소장으로 가기도 어렵게 된다.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가진 국민은 약 6만 명이다. 그중 관리소장이나 관리소 간부로 일하는 이는 3분 1가량이다. 주택관리사가 절대적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채희범 인천시회장은 “주민회장 중 상당수가 관리소장은 자기가 돈 주고 고용하는 사람,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관리소장이 주민 대표 측과 결탁해 관리 책임을 저버리는 일도 흔히 생긴다. 부정한 정권에 유착해 이득을 챙기는 공직자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H대 이모 교수는 “동대표들의 전횡 못지않게 관리소장의 ‘부역’도 나쁘다”고 했다. 그는 약 10년 전에 서울의 한 아파트 동대표 선거에 나갔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 교수가 아파트 ‘정권 교체’를 추진하며 제안한 데 따른 것이었다. 뜻을 함께한 몇몇 사람이 동대표 선거에 출마하자 기존 동대표들이 횡포를 부렸다. 이 교수는 “이웃집 교수를 상대로 누군가가 비리 교수라는 내용의 편지를 대학본부로 보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관리소장이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막으려 들었다. 기존 동대표들과의 공범, 공생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그러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 남편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S대 정치학과 교수다. 그 교수는 “그때 옆에서 보니 민주주의로 포장된 온갖 부조리가 내가 사는 아파트에 똑같이 있었다”고 말했다.
 
관리사협회는 국회에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을 요구했다. 관리소장 임기 보장, 입주자 대표회의 의결과 관리소장의 집행 권한 명확히 구분, 아파트 관리 근로자에 대한 폭언·폭행 처벌 강화를 주장한다. 그래서 삭발까지 했다. 국회와 정부가 제도 마련을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왔다.
 
하지만 기대가 망설여진다. 선량한 관리자들을 협박하며 ‘부당 거래’를 강요하는 독재자가 곳곳에 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기들의 갑질과 횡포를 ‘민주적 통제’라고 우기는 엉터리 민주주의가 온 사회를 뒤덮고 있다. 지금 나라 꼴이 이런데 아파트 관리만 말끔해질 수가 있을까.
 
“욕망의 소수가 무관심 다수 속이는 아파트 정치는 생활 민주주의 무덤”
아파트 민주주의

아파트 민주주의

아파트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주민이 있다. 2015년부터 4년 동안 수원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을 맡았던 남기업(50) ‘토지+자유연구소’소장이다. 그는 지난 6월에 『아파트 민주주의』(사진)라는 책을 냈다. 그곳에 아파트 내부 권력을 차지했던 기존 세력에 맞서 싸운 그의 노력이 기록돼 있다.
  
‘직업 동대표’와 맞서 싸운 남기업씨
 
그는 책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인이 “정의를 입고 달고 살면서 동네에는 왜 이렇게 관심이 없느냐”며 동대표 출마를 권유해 ‘아파트 정치’에 뛰어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동대표가 된 뒤에는 회장 선거에 나서 당선했다. 그 뒤 그는 전 회장 측 동대표들에 의해 세 차례의 ‘탄핵’ 위기를 맞았다. 그 과정에서 법원·시청·경찰서를 숱하게 가야 하는 상황을 겪었다. 수년에 걸친 그 투쟁의 결과로 1600여 세대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른바 ‘직업 동대표’들이 모두 사라졌고, 그들과 결탁했던 관리소 측 인사들도 교체됐다. 관리비 부정 사용 문제도 드러났다.
 
‘아파트에서 가장 힘센 사람은 회장이다. 다수의 동대표가 회장을 지지하면 아파트는 그의 왕국이나 다름없다. 관리소장과 직원들은 회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관리소장 임면권이 사실상 회장에게 있기 때문이다.’ ‘비리를 일삼는 회장이 1년간 아파트 활동에서 버는 돈은 얼마일까? 아마도 보통 사람의 연봉 수준을 훌쩍 넘는 액수일 것이다. 힘도 별로 들지 않고 게다가 융숭한 대접도 받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파트 민주주의』에 이렇게 쓰여 있다. 따라서 인천 아파트 사건 희생자인 고(故) 이경숙씨는 회장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면서 선량한 관리자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년 투쟁 책에 담아 주민 독재 고발
 
남 소장은 전화통화에서 “어느 아파트에서나 80% 이상의 주민은 입주자 대표회의에 관심이 없다. 그 나머지 중에서도 타락한 소수가 아파트를 주민주권의 무덤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금전적 이득까지 따라오는 권력의 맛을 아는 소수는 자신들을 가로막는 주민이나 관리소장과의 극단적 대결도 불사한다. 인천 아파트 사건은 이런 현실에서 파생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남 소장은 관리소장에 대한 주민회장의 횡포 또는 관리소장과 회장의 부정한 결탁을 막는 데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리소장 임면권을 지자체가 갖고, 지자체가 공적 감사를 통해 아파트 관비리 사용을 감시하면 아파트의 회장 독재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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