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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법·비리 판치는 썩은 지도층은 ‘노블레스 말라드’

중앙선데이 2020.11.14 00:21 711호 24면 지면보기

콩글리시 인문학

칼레의 시민

칼레의 시민

한국은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룬 세계 유례없는 압축성장 국가다. 1인당 국민소득이 배가 된 기간을 보자. 영국은 1780년부터 시작해 58년이 걸렸다. 미국은 1839년부터 따지면 47년, 일본은 1885년에서 1919년까지 34년 걸렸다. 우리는 1966년부터 77년까지 불과 11년 만에 2배가 되었다. 압축성장은 부작용을 낳았다. 졸부(猝富, new rich)와 졸귀(拙貴, new high)들의 양산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상층은 있는데 상류사회가 없고, 고위직 층은 있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가 없다고 연세대 송복 교수는 말한다.
 

기득권을 내려놓는 책임 외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미 퇴색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 2000년 역사를 지탱해준 힘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이라고 지적했다. 서구사회가 300년 걸려서 이룩한 것을 우리는 1960년대부터 불과 30년 만에 이루다 보니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가 제대로 확립될 시간이 없었다.
 
위장 전입을 수없이 하고도 헌법재판관이 되고 교통위반 티켓을 수차례 받고도 장관이 되는 세상이다. 논문표절은 다반사다. 역사의 동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노블은 귀족이나 지도층, 오블리주는 책임이나 의무다. 국민의 수범이 되고 사표가 되는 인물이나 집단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부동산값 올라도 문제없다. 세금만 잘 내시라”고 했던 김진애 의원은 다주택자로 비판받자 “어쩌다 다주택자가 됐다, 종부세 잘 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금 잘 내는 것은 모든 국민이 해야 할 의무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다. 프랑스어에서 온 영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렇게 본래 뜻이 퇴색한 콩글리시가 됐다.
 
국가 사회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거룩한 행위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한마디로 특혜받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특혜와 책임은 동전의 안팎이다. 송복 교수는 저서 『특혜와 책임』에서 특혜받은 사람들의 책임은 희생(犧牲)이라고 했다. 첫째, 목숨을 바치는 희생이다. 포클랜드전쟁에 앤드류 왕자가 앞장서 참전한 일이나 ‘칼레의 시민(사진)’이 그 표상이다. 백년전쟁에 패한 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는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요청대로 시민들을 대신해 처형당할 6명을 뽑아 보내야 했다. 이때 목숨을 내놓겠다고 먼저 나선 사람은 칼레 제일의 부자와 시장 등이었다. 세계 1·2차대전 때 앞장서 싸우다 목숨 바친 이튼 스쿨 졸업생이 2000명에 이른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 중 142명이 장군의 아들이었다. 둘째, 기득권을 내려놓는 희생이다. 이 땅의 그 많은 관료 마피아들의 몰염치는 이와 정반대다. 셋째, 배려와 양보 그리고 헌신이다. 온갖 편법과 비리 부정을 밥먹듯 해온 지도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 malade)다. 프랑스어 malade는 썩은, 병듦을 뜻한다. 특권은 책임을 수반한다(Privilege entails responsibility).
 
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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