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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 제왕’ 아틸라, 동·서로마 무너뜨려 유럽 지형 리셋

중앙선데이 2020.11.14 00:21 711호 22면 지면보기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2〉

‘훈족 제왕’아틸라는 두 차례의 발칸전쟁을 통해 동로마 제국을 속령으로 삼았다. 그림은 1870년 모르 탄 작품 ‘아틸라의 만찬’, 헝가리국립미술관 소장. [그림 위키미디어]

‘훈족 제왕’아틸라는 두 차례의 발칸전쟁을 통해 동로마 제국을 속령으로 삼았다. 그림은 1870년 모르 탄 작품 ‘아틸라의 만찬’, 헝가리국립미술관 소장. [그림 위키미디어]

훈족 제왕 아틸라는 서양 사가들의 편견에 찬 혹평과 달리, 최후의 시기만 보아도 스마트하고 위풍당당하며 매우 영민한 리더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디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아 평화조약을 잘 이행하지 않았다. 훈 제국 고트족 출신 장수를 송환하지 않고, 도리어 훈 제국 공격용 장수로 기용했다. 동로마 마르고스(Margos) 주교의 동로마 영내 훈 왕족 무덤 도굴 사건이 발생하자, 아틸라는 441년~442년 동로마 원정에 나섰다. ‘제1차 발칸전쟁’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속령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아틸라 군대는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접근했다.
 

민족 대이동, 현 국가 위치로 정착
아틸라, 신사적인 영민한 리더
사가들 혹평과 달리 포악 안 해

동로마 두 차례 정벌 후 속령 삼아
‘팍스 로마나’ 해체 뒤 중세 시작

아발·불가르족 등 고조선 후예
유럽 진출 길 열어주는 역할도

위급해진 테오디시우스 2세는 서로마 군사령관 아에디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에티우스가 달려와 아틸라에게 자기 아들을 인질로 맡기며 사정하여 평화조약 준수를 서약했다. 아틸라는 국경지대의 동로마 측 군사 요새를 모두 파괴하여 훈족에 대한 침략 진지를 없애버린 후에 443년 전선에서 귀환했다.
 
10만 기병 이끌고 이탈리아 진군
 
445년 형 브레다가 사망하여 아틸라가 훈 제국의 단독 제왕이 된 후에, 아틸라가 전쟁을 자제한다는 사실을 안 동로마는 또 조공 공납금 지불을 미루었다. 도망해 들어간 훈 제국 신민 게르만 족 병사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평화조약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아틸라는 446년 다시 동로마 원정에 나섰다. ‘제2차 발칸전쟁’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속령들이 속속 아틸라에게 항복했다.  
 
매우 다급해진 테오디시우스 2세는 정무관 아나톨리우스를 보내 항복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동로마의 조건은 ①국경선에서 동로마 쪽으로 5일 거리 이내의 비무장지대 설치 ②전쟁 배상금 황금 6000 리브레(약 2700kg) 지불 ③매년 조공액 3배 인상, 2100리브레(약 945kg)씩 공납 등이었다. 이렇게 ‘아나톨리우스 협정’은 전쟁 배상금 지불까지 서약을 했으니 객관적으로는 ‘항복’이었다. (약속만 지키면) 동로마 제국은 훈 제국의 속령이 된 것이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아틸라는 참혹한 전쟁을 피하여 동로마의 ‘항복’을 받고 전투 없이 귀환하였다. 449년 테오디시우스는 환관들과 아틸라 ‘암살 음모’를 꾸몄다. 훈의 사절단 일원인 에데콘을 매수하고, 하수인으로 동로마 통역 비길라스를 시켜 아틸라를 시해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동로마의 음모를 모른 채 친선사절단에 동행한 인물이 당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에데콘은 동로마 친선사절단이 아틸라의 궁전에 도착하자 암살 음모를 아틸라에게 고해 버림으로써, 암살 음모는 무산됐다.  
 
아틸라는 451년 원정 구실로 로마의 속령 갈리아 지방을 호노리아(Honoria)의 지참금으로 요구하면서 20만 명(훈족 기병 10만, 동고트 등 게르만 족 보병 10만)을 인솔하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 지방으로 향했다. 서로마의 군사령관인 갈리아 총독 아에티우스가 20만(로마군과 서고트왕 데오도리크의 군대, 절대다수가 보병) 대군을 인솔하고 대응하였다. 대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루니아 평원에서 있었다. ‘카탈루니아 대전투’ ‘살롱 대전투’라 부른다. 양축 군은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에드워드 기본에 의하면 하루 전투에 16만2000명이 전사했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서양 사가들은 로마가 처음으로 아틸라를 참패시킨 승리라고 썼다. 증거로는 아틸라 군대의 철수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훈의 기병대는 전진과 후퇴를 자유자재로 해서 뚫리지 않으면 철수하여 다른 뚫릴 곳을 공격한다. 철수가 전혀 패전이 아니다. 더구나 최근 연구는 이 전투에서 서고트왕이 전사하고, 서로마 사령관 아에티우스가 아틸라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아틸라군이 철수했음이 밝혀졌다. 구태여 승패를 더 따진다면 전사자 대부분은 양측 보병들이었고, 아틸라 기병대는 병력을 대부분 온존시킨 채 철수한 것이었다. 그 증거는 1년 후에 나타났다.
 
아틸라 초상. [그림 위키미디어]

아틸라 초상. [그림 위키미디어]

452년 아틸라는 훈족 기병 10만을 인솔하고 방어가 약한 서로마 제국 본국(지금의 이태리 반도)으로 진군했다. 서로마 황제는 갈리아 총독·군사령관 아네티우스에게 긴급방어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서로마 황제에게 긴급히 안전한 동로마 제국에 피란할 것만 권고하고 출병하지 못했다. 아직 ‘카탈루니아 대결투’의 손실을 회복하지 못해 출정해도 참패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의 기병부대는 첫 방어선 아퀼레이아에서 약간의 저항을 받았을 뿐, 나머지 도시들은 거의 무혈 입성하였다. 당시 수도 베로나도 마찮가지였다. 아틸라의 군대가 지금의 밀라노를 점령한 후 로마를 향하여 남진하고 있을 때, 서로마 황제의 요청을 받은 바티칸의 교황 레오(Leo) 1세가 평화 교섭을 하러 아틸라를 찾아왔다.
 
레오 1세 교황과 아틸라 사이에 협약이 이루어지자 아틸라는 부하들의 항의를 달래가며 진군을 중지시키고 철수를 시작하였다. 레오 1세-아틸라 협약의 내용은 비밀에 묻혀 있다. 단지 레오 1세가 로마 도시 파괴의 방지를 요청해서 아틸라가 수용했다는 것과 아틸라의 다음 원정 행선지가 사산 왕조 페르샤 왕국이라고 말해서 서로마에 평화가 왔음을 알린 것뿐이었다.  
 
레오 1세의 비밀협약은 무엇일까? 왜 서양 사가들은 밝히지 않을까? 필자는 서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 이상의 조건으로 아틸라에 항복했다고 추정한다. 그랬으니까 다음 행선지가 중동의 왕국이라고 교황에게 말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기병 부대, 철제 등자 등 유럽에 전수
 
아틸라는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의 궁전으로 귀환해 속령 게르만 족 제후의 딸 일디코(Ildico)와 결혼한 뒤 연회에서 술에 취해 침실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늦게 기척이 없어 호위병들이 들어가 보니 아틸라는 피가 흥건한 가운데 사망해 있었고, 신부는 울고 있었다. 아틸라의 죽음에는 독살, 복상사, 타살 등 각종 설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아직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아틸라의 죽음은 허망했지만 아틸라는 당시 동·서 로마의 어느 황제보다도, 당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의 어느 족장보다도, 잔인하거나 포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신사적이었다. 그는 누구도 암살하지 않았으며, 배신자 외에는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살해와 약탈은 게르만족 족장들이 자행한 것을 아틸라에게 돌려 기록한 것들이었다. 아틸라에 대한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틸라 사망 후 훈 제국은 아들들이 승계했으나, 지켜낼 능력이 부족해 469년 멸망했다.  
 
아틸라의 ‘훈 제국’은 단명했으나,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유럽에 민족대이동을 일으켜 전체 유럽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훈 제국 이후의 유럽 각 민족 이동 결과 정착지가 지금의 각 민족과 국가의 위치가 되었다.
 
둘째, 로마 패권 하의 평화체제(Pax Romana)가 붕괴되어, 결국 고대사회체제가 해체되고 중세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셋째, 동방 고조선 문명의 다른 기마민족인 아발(Avars), 불가르(Bulgars), 마잘(Magyars) 그리고 투르크(Turks) 족들의 유럽 진출의 길을 열어 주었다. 넷째, 군사 조직상 기병 부대의 편제와 전술, 기마 용구를 유럽에 전했다. 
 
호노리아(Honoria)
서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의 딸. 호노리아가 애인 시종무관장을 황제로 만들려다 음모가 발각되어 시종무관장은 처형되고 호노리아는 동로마에 보내져 14년이나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450년 호노리아는 자기를 구해 서로마에서 지위를 되찾아줄 인물로 아틸라를 선택했다. 정략결혼을 위한 청혼이었다. 서로마 제국 정복을 구상하던 아틸라는 이 청혼을 정략적으로 수락하고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는 놀라서 이를 수락한 후 귀찮은 호노리아와 환관을 서로마로 환송해 버렸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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