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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확장, 교육 투자, 경제 성장에 물불 안 가린 장쭤린

중앙선데이 2020.11.14 00:21 711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1〉

북양정부 4대 총통 쉬스창(徐世昌, 한가운데)과 내각 성원, 각 성의 독군(督軍)들과 함께 프랑스 군사대표단 환영식에 참석한 장쭤린(앞줄 왼쪽 다섯째). 1918년 10월 27일, 베이징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북양정부 4대 총통 쉬스창(徐世昌, 한가운데)과 내각 성원, 각 성의 독군(督軍)들과 함께 프랑스 군사대표단 환영식에 참석한 장쭤린(앞줄 왼쪽 다섯째). 1918년 10월 27일, 베이징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중화민국은 북양정부와 국민정부의 통칭이다. 북양정부는 1912년에 집권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이듬해 10월 6일 초대 대총통에 선출되면서 출범한 청나라 멸망 후 최초의 합법적인 중국정부였다. 주축은 위안스카이가 배출한 북양군벌이었다. 북양정부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북벌군에게 멸망하기까지 4단계를 거쳤다.  
 

북양정부의 마지막 집권자 역임
일 처리 신속, 완고하지만 청렴

원수였어도 인재는 과감히 기용
출신·학력 안 봐 만주인들 호감

미 유학파 딸, 한국전쟁 때 통역
중국 최대 규모 둥베이대학 설립

설립자 위안스카이 사망 후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와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가 장악한 환(晥)파와 직(直)파가 4년씩 정국을 주도했다. 돤치루이와 우페이푸는 북양군벌의 적자(嫡子)였다. 출신성분도 좋았다. 돤은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톈진(天津)에 설립한 군사교육기관인 북양무비학당(北洋武備學堂) 1기생이었다. 졸업 성적도 1등이고 독일에서 포병 교육까지 받았다. 리훙장이 “배움에 지친 적이 없고 민첩하다”며 엉덩이를 두드려 줄 정도였다. 우페이푸는 수재였다. 12살 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했다. 집안이 가난해 먹고살기 위해 군복을 입었다.
 
북양정부의 마지막 집권자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돤치루이나 우페이푸와 달랐다. 배운 것도 없고, 마적 출신이다 보니 북양정부와 연줄이 없었다. 펑톈(奉天)의 혁명세력을 진압한 공으로 펑톈성의 군정을 장악한 후에도 위안스카이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1912년 임시 대총통 명의로 보내온 육군 중장 계급장과 27사단장에 임명한다는 종이 한 장이 다였다. 1년 후 위안스카이가 장쭤린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때가 되면 관직을 높여 주겠다는 암시만 하고 돌려보냈다.
  
한때 위안스카이에게 농락당해
 
리훙장이 건립한 북양함대(北洋水師)는 청일전쟁 때 거의 괴멸됐다. 북양정부가 새로 편성한 북양해군. [사진 김명호]

리훙장이 건립한 북양함대(北洋水師)는 청일전쟁 때 거의 괴멸됐다. 북양정부가 새로 편성한 북양해군. [사진 김명호]

위안스카이는 의심이 많았다. 한동안 장쭤린을 갖고 놀았다. 측근을 펑톈장군 겸 동삼성(東三省) 절제사에 임명했다. 장쭤린은 미련하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위안의 측근도 장씨였다. “500년 전 우리는 형제였다”며 금 덩어리를 안겨줬다. 뒤로는 두 차례 사람을 베이징에 파견해 낙마 운동을 했다. 겨우 쫓아내자 육군상장 돤즈꾸이(段芝貴·단지귀)가 어마어마한 직함으로 펑톈에 나타났다. 돤즈꾸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장쭤린은 여론에 기댔다. 펑런츠펑(奉人治奉), 펑톈은 펑톈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벽보가 도처에 나붙었다. 시위도 줄을 이었다. 당시 펑톈은 만주 전역을 의미했다. 돤즈꾸이는 제 발로 펑톈을 뒤로했다. 위안스카이는 여론을 무시하지 않았다. 장쭤린에게 성무장군겸펑톈순안사(盛武將軍兼奉天巡安使)라는 직첩을 내리고 세상을 떠났다. 장쭤린은 사돈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에 임명하고, 지린(吉林)성 성장도 측근으로 교체했다. 이쯤 되면 동북왕(東北王)이나 다름없었다.
  
군벌 시절엔 끔찍한 부하 사랑
 
북양군벌의 창시자 위안스카이. [사진 김명호]

북양군벌의 창시자 위안스카이. [사진 김명호]

장쭤린은 부하 아낌이 다른 군벌과 달랐다. 얻어맞고 돌아오면 참지를 못 했다. 떠도는 일화가 있다. “윤락가에 일본 여인들이 많았다. 동북군 사병들이 자주 출입했다. 하루는 일본 군인과 싸움이 벌어졌다. 동북군 두 명이 맞아 죽었다. 일본 측에서 관례라며 한 명당 500위안(元)씩 보상금을 지불했다. 보고를 받은 장쭤린은 열이 올랐다. 부하들에게 1500위안 주며 일본인 3명을 패 죽이고 오라고 지시했다.”
 
부인들과 자녀들에겐 엄격했다. 거드름 피우거나 사고 친 적이 없었다. 셋째 부인 남동생이 거리에서 술 먹고 난동 부리자 총살했다. 딸들의 결혼 상대는 직접 골랐다. 누가 권해도 듣지 않았다. 셋째 딸을 며느리 삼고 싶다는 은인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의 청도 그래서 거절했다. “저는 대인을 의부(義父)로 모셨습니다. 딸도 대인을 할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삼촌과 결혼하면 족보가 엉망이 됩니다.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오얼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쭤린은 훗날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자오 총독에게 미안한 일이 있다. 나 죽으면 셋째를 총독의 외아들과 결혼시켜 외국으로 보내라.” 삼촌과 조카는 금슬이 좋았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유엔에 근무했다. 한국전쟁 초기 유엔 안보리에 참석한 중공대표 우슈취안(伍修權·오수권)의 통역이 장쭤린의 딸이었다.
 
장쭤린은 무슨 일이건 속도가 빨랐다. 완고하고 부패하지도 않았다. 동북의 군비 확장과 교육,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한때 원수진 일이 있어도 인재는 과감히 기용했다. 출신이나 학력 따위는 따지지 않았다. 만주인들은 이런 장쭤린을 좋아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되면서 겪었던 불안감을 없애줄 지도자라고 믿었다. 명참모들이 새로운 동북왕을 에워쌌다.
 
교육 투자는 엄청났다. 1922년에 설립한 둥베이(東北) 대학은 중국 최대 규모였다. 매년 투자액이 2위였던 베이징대학의 3배가 넘었다. 전국에 있는 유명 교수들을 대거 초빙했다. 군수산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병창 설립에 5억 위안을 투자했다. 당시 북양정부 1년 재정수입이 1억7000만 위안일 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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