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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건조대·블라인드·놋쇠방울이 ‘기묘한’ 예술품으로

중앙선데이 2020.11.14 00:20 711호 19면 지면보기

[아티스트 라운지] 미술가 양혜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내 서울 박스에 설치된 작품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안에 선 양혜규 작가. 김현동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내 서울 박스에 설치된 작품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안에 선 양혜규 작가. 김현동 기자

최근 투애니원 출신 씨엘이 미국 CBS 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더 레이트 레이트 쇼’에서 신곡 영상을 선보였다. 현란한 랩과 댄스를 보이는 씨엘의 뒤로 보이는 것들이 심상치 않다. 블라인드로 이루어진 원통형 거대 구조물, 검은 털로 덮인 방패와 밀짚으로 뒤덮인 괴생명체 같은 조각, 놋쇠방울로 덮인 거대 기물들…. 이들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₂ & H₂O’(2021년 2월 28일까지)에 나온 미술가 양혜규(49)의 작품들이다. 씨엘 측은 “해외에 한국 예술을 보여줄 대표적인 장소와 미술가로 국립현대미술관과 양혜규 작가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세계 5곳 미술관서 동시 개인전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명
‘아시아 여성 작가’라는 인식 경계

“내 작품은 어려운 게 아니라 모호
세상 알수록 간단히 요약 어려워
빨랫대는 ‘삶’을 증명하는 기구”

지난해 말 영국 현대미술 잡지 아트리뷰가 선정한 ‘파워 100’에서 36위에 오른 양 작가는 현재 해외 주요 미술관 4곳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의 콘월 분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지난달 24일 시작된 ‘이상한 끌개’(2021년 5월 3일까지)를 비롯, 필리핀 마닐라 현대미술디자인박물관의 ‘우려의 원추’(2021년 2월 28일까지), 캐나다 온타리오미술관의 ‘창발’(2021년 1월 31일까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손잡이들’(15일까지)이 그것이다.
  
“세상과 사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어”
 
‘소리 나는 동아줄’과 ‘중간 유형’ 시리즈. 김현동 기자

‘소리 나는 동아줄’과 ‘중간 유형’ 시리즈. 김현동 기자

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가 중 한 명이지만, 미술계 안에서도 작품이 난해하다는 불만이 종종 나오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양 작가는 “내 작품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호한 것”이라며 “세상과 사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요약이 어려워지고 함부로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책임이 커진다. 관람객들이 잘 보면 ‘맞아, 사실 우리도 알고 있었어’ 할 만한 것을 특정 이슈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다루기보다 고유한 형식이나 시각언어로 표현하고 싶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에 따른 새로운 내셔널리즘이 발흥하고 있는 가운데, 여러 미술가가 자신의 젠더나 인종 등 태생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반면 당신은 ‘유럽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강조되는 것을 경계하는 인상을 받는다.
“정확히 보았다. 국내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으나 해외에서는 ‘한국 여자 작가’라는 정체성이 작가 특성 전체를 플랫하게(평평하고 얄팍하게) 보이게 할 위험이 있다. 게다가 나는 어떤 이슈에 함몰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뉴스를 많이 보고 관심이 많지만, 미술가로서 활동할 때 특정 이슈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보다 그 이슈들을 나의 고유한 언어와 방법으로 다루고 싶다.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의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표어로 붙는 순간 그 힘은 약화되고 고정되며 더 이상 능동성이나 생명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인종·젠더 등의 이슈는 뉴스보다 학교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작가는 모교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의 첫 아시아인 교수다).”
 
어떤 이슈를 작품에 반영하는가.
“요즘의 ‘인류세’에 나도 영향을 받는 것 같다(‘인류세’란 인간의 산업활동으로 지구의 환경이 극단적으로 바뀌는 현대를 아예 새로운 지질시대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온 개념이다). 기존의 역사는 (자연사와 분리해) 인간의 역사만 다루어왔는데, 지금의 이슈는 그 선을 넘나든다. 코로나19도 정신없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질주하던 인간 역사의 바퀴를 비인간적 존재가 멈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존재’라고 하는 것도 낯설지만, 우리가 존재·개체를 보는 것도 지금까지 인간 단위로 생각해온 경향이 있다. 분자로 가면 존재의 단위가 달라진다. 앞으로는 생각과 개념의 단위조차 달라질 것이다. 전시 제목이 ‘공기와 물’이 아닌 ‘O2 & H2O’인 것도 이를 함축한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인류세’에 관심 늘어
 
‘소리 나는 가물’ 시리즈. 김현동 기자

‘소리 나는 가물’ 시리즈. 김현동 기자

2006년 사진 연작 ‘접힐 수 있는 것의 체조’부터 이번 최신작 ‘소리 나는 접이식 건조대-마장마술’까지 빨래건조대가 모티프인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중반) 귀국해서 아현동의 재개발 직전 산동네에 전세방을 얻었는데, 집들이 너무 좁아 빨랫대(빨래건조대)를 모두 길에 내놓는 곳이었다. 그 빨랫대가 삶의 표시로 느껴졌다. 그리고 2006년 인천 사동 폐가(작가의 외할머니가 살았던 집으로 할머니 별세 후 오랫동안 방치됨)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했는데, 사람들이 빈집에 쓰레기를 갖다 버려 별의별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였다. 싹 치우고 나서 휑한 집을 보다가, 마침 동네에서 빨랫대를 발견하고 일종의 ‘삶’의 요소를 심듯 설치했다. 그런데 빨랫대가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은 사실 부끄러운 순간이다. 가족을 빨랫대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족만큼 누구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그 내밀한 부분을 남에게 보여주기 껄끄러운…. 빨랫대는 누구나 갖고 쓰지만, 누가 집에 오면 접어서 숨긴다. 하지만 그것조차 삶의 일부다. 그렇게 빨랫대는 숨을 쉬듯 펼쳐졌다 접혀졌다 한다.”
 
전시에 맞춰 양 작가에 대한 첫 국문 비평 선집 『공기와 물: 양혜규에 관한 글모음 2001-2020』도 출간됐다. 지난 20년간 그의 작업과 관련해 다양한 국내외 필자가 쓴 글 중 36편을 골라 연대순으로 실었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moon.s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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