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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대신 노트에 적어요”…몰입하는 삶 만드는 기록의 힘

중앙일보 2020.11.13 11:03
지난 7일부터 서울 홍대 인근의 가구 브랜드 쇼룸 ‘스탠다드 에이’에서 작지만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 이름은 ‘아임 디깅(I’m digging)’. ‘관심을 관점으로 키우는 기록’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디깅은 땅을 파 깊게 내려간다는 의미다. 대체 무엇을 판다는 얘기일까. 전시장을 들여다보니 자신의 관심사를 노트에 적는 과정을 ‘디깅’으로 표현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가구 쇼룸 '스탠다드 에이'에서 열리고 있는 '아임 디깅' 전.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17인이 100일간 기록한 노트를 전시한다. 장진영 기자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가구 쇼룸 '스탠다드 에이'에서 열리고 있는 '아임 디깅' 전.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17인이 100일간 기록한 노트를 전시한다. 장진영 기자

 

노트 전시 ‘아임 디깅’전
관심을 관점으로 키우다

마케터, 음악가, 일러스트레이터, 목수, 요트 국가대표, 디자이너 등 총 17명이 100일간 기록한 노트가 전시의 주인공이다. 가구 쇼룸 곳곳에 놓인 책상과 테이블, 선반 위에 노트가 한 권씩 전시돼 있다. 국내 식품 대기업 마케터가 100일간 노트를 기록하며 일에 대해 고민한 흔적, 브랜드 디자이너가 100일간 음악을 들으며 적어 내려간 음악 목록, 한 등산 마니아가 100일간 정복한 산에 대한 정보 등이 노트에 빼곡하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을 거닐며 이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글로벌비즈니스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는 마케터 올리부(필명)의 노트. 100일 동안 흥미가 가는 작은 물건들과 브랜드를 기록했다. 장진영 기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글로벌비즈니스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는 마케터 올리부(필명)의 노트. 100일 동안 흥미가 가는 작은 물건들과 브랜드를 기록했다. 장진영 기자

 
남의 일기장을 엿보듯 타인의 기록을 들춰보는 일은 생각보다 재밌다. ‘요가 하기’ ‘산책하기’ 등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적어 내려간 음악가의 기록은 마치 내 일기장같이 친근하다. 등산을 목표로 정하고 왔다 갔다 승차권까지 붙여 놓은 노트는 나도 이런 취미 하나 만들어볼까 욕심이 생긴다. 무엇보다 한 주제에 깊이 몰입해나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엿볼 수 있다.   
웹디자이너 이미림씨의 디깅 노트. 운동, 특히 등산에 몰입했던 100일간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승차권과 사진 등을 첨부해 기록한 노트. 장진영 기자

웹디자이너 이미림씨의 디깅 노트. 운동, 특히 등산에 몰입했던 100일간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승차권과 사진 등을 첨부해 기록한 노트. 장진영 기자

 
문구 브랜드 ‘소소문구’에서 기획한 이번 전시는 ‘디깅 노트’의 용례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노트나 다이어리를 소개할 때는 이용 예시가 첨부된다. 이 노트를 이런 식으로 쓰면 된다는 친절한 가이드다. 하지만 노트 디자이너들이 직접 제작하는 용례는 어딘가 작위적일 수밖에 없다. 소소문구 유지현 공동 대표는 “사람들이 실제로 기록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기획”이라며 “실제로 여러 사람의 노트를 받아보니 기록 방식이 예상보다 훨씬 자유롭고 다양해서 놀랐다”고 했다.  
'코사이어티' 브랜드 디자이너 이현아씨의 노트. 100일 동안 들었던 음악에 대해 기록했다. 장진영 기자

'코사이어티' 브랜드 디자이너 이현아씨의 노트. 100일 동안 들었던 음악에 대해 기록했다. 장진영 기자

 
100일간의 기록을 의뢰한 사람들은 유명인은 아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모두 노트에 뭔가를 기록하는 데 열심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전시를 계기로 처음 노트에 기록이라는 걸 작정하고 해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전시의 미덕이다. 기록을 꾸준히 해 본 적 없는 사람도 노트를 쓰는 것만으로 한 가지 주제에 깊게 몰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글씨가 예쁘지 않아도, 꼼꼼하지 않아도 나만의 노트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때론 한 줄 정도의 메모로도 기록은 완성된다. '나 자신'에 대해 파 내려간 음악가 이자람의 노트. 장진영 기자

때론 한 줄 정도의 메모로도 기록은 완성된다. '나 자신'에 대해 파 내려간 음악가 이자람의 노트. 장진영 기자

 
이번 전시를 기획한 소소문구 김청 브랜드매니저는 “주로 스마트폰 메모 앱을 이용했던 이들이 노트 기록을 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며 “노트 한 권에 자신의 관심사를 기록하다 보면 누구나 나만의 금광·은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디깅 노트의 앞표지에는 삽을, 종이 옆면에 금박·은박을 넣은 이유다.  
스니커즈 디자이너 이근백씨가 노트에 기록한 4컷 만화. 100일동안 무엇을 그릴지 탐구했다. 장진영 기자

스니커즈 디자이너 이근백씨가 노트에 기록한 4컷 만화. 100일동안 무엇을 그릴지 탐구했다. 장진영 기자

 
“디깅을 시작하면서 일과 별개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주말 등산 기록을 노트에 적어 내려간 웹디자이너 이미림씨의 소감이다. 곧 다가올 새해, 기록의 습관을 결심했다면 이들 노트를 엿보러 한 번쯤 방문해도 좋겠다. 전시는 22일까지.  
'아임 디깅' 전시 포스터. 사진 소소문구

'아임 디깅' 전시 포스터. 사진 소소문구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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