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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115년 전 외교권 박탈, 고종 재가도 없었다

중앙일보 2020.11.12 00:21 종합 22면 지면보기

을사늑약이 무효인 이유

서울 덕수궁 중명전(수옥헌)에 재연한 1905년 11월 을사늑약 현장의 모습. 일본은 열리지지도 않은 어전회의를 빙자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하루아침에 강탈했다. [뉴시스]

서울 덕수궁 중명전(수옥헌)에 재연한 1905년 11월 을사늑약 현장의 모습. 일본은 열리지지도 않은 어전회의를 빙자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하루아침에 강탈했다. [뉴시스]

입동이 지났다.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이다. 찬바람 사이로 낙엽이 날린다. 떨어져 나가는 이파리의 아픔과 홀로 남는 나뭇가지의 외로움. 11월은 한 해의 겨울에 들어가는 초입이다. 동시에 한 시대의 겨울에 들어가는 초입이기도 하다.
 

일, 조약 비준 위한 어전회의 요구
의정부 회의·중추원 자문도 생략
이토, 어전회의 빙자해 밀어붙여
아무런 근거 없는 국제조약 악명

대한제국의 겨울은 11월에 시작됐다. 1905년 11월 18일 0시 전후 경운궁의 밤하늘은 소위 을사늑약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 정부에 한국 외교권 일본 위탁 조약안을 강요했다. 이윽고 충격적인 늑약 소식이 조야에 퍼졌다.
 
인심이 들끓었다. 오적(五賊)의 처벌과 늑약의 취소를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황성신문 11월 20일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은 항일 언론에 불을 질렀다. 논설은 강경했다. ‘4천리 강토와 5백년 종사를 타인에게 봉헌하고 2천만 생령을 타인의 노예로 몰아넣은 개돼지만도 못한’ 한국의 대신들을 규탄했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기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지에 멸망해 버렸는가?’ 하고 외치며 비통해했다. 논설은 ‘통재, 통재, 동포, 동포’를 부르짖으며 끝마쳤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절규, 지금도 비통
 
황성신문이 폐쇄되자 대한매일신보가 투쟁을 이어나갔다. 황성신문에 게재된 늑약의 전말에 관한 기사를 입수해서 22일부터 25일까지 연재했고, 27일에는 최종적으로 이 사건의 전말을 정리해서 호외로 내보내 늑약의 부당함을 포고했다. 호외는 각각 ‘韓日新條約請諦顚末’(한일 신조약 체결 요청 전말)이라는 한문 기사와 ‘THE MAKING OF A TREATY AND THE PASSING OF AN EMPIRE’(조약 체결과 제국 멸망)라는 영문 기사인데 늑약의 전말에 관한 내용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감상하고 싶은 사람은 이 호외를 읽으면 된다.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과 국권을 잃은 슬픔을 토로한 장지연. [중앙포토]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과 국권을 잃은 슬픔을 토로한 장지연. [중앙포토]

여기서 잠시 조약 체결 전말 기사를 보자. 11월 11일 친서를 봉정한 이토는 15일 고종을 알현하고 16일 한국 대신들을 초청해 3개 조항의 조약안 체결을 요구했다. 한국 외부(외무부) 폐지와 한국 외교권 일본 위탁, 주한 일본 공사의 통감 개칭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17일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한국 정부 대신들을 초청해 동일한 요구를 반복했다. 하야시는 어전회의 개회를 요구했으나 참정대신 한규설은 정부회의로 결정할 문제이지 어전회의는 필요 없다고 거부했다.
 
하야시는 곧장 경운궁에 직행해 대신들에게 어전회의 개회를 요구했고, 곧이어 일본군이 궁궐에 난입해 곧장 고종의 처소가 있는 수옥헌(漱玉軒)으로 진격해 총검으로 겹겹이 포위했다. 이어서 현장에 도착한 이토는 어전회의를 요구했으나 참정대신 한규설이 듣지 않았고 고종도 필요 없으니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거절하자 즉석에서 논의하여 조약안에 대한 문구 수정과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가부 의견을 받아냈다. 한국 외부에 일본군을 보내 관인을 강탈해 조약을 조인했다.
 
전말을 읽다 보면 의문이 든다. 이날 정부 회의는 열렸던 것일까. 강압적인 분위기였지만 어쨌든 정부 회의를 통해서 조약안의 가부가 결정됐는가. 그러나 정부 회의가 열렸다는 증거는 없다. 일찍이 갑오개혁 기간의 ‘내각관제’도 그랬지만 대한제국기의 ‘의정부관제’에 따르면 국제 조약은 의정부 회의를 거친다고 명시돼 있다. 을사늑약의 경우 16일 일본 공사관으로부터 한국 외부에 조약 제의가 들어왔으나 의정부 회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의정부 회의란 무엇인가. ‘의정부회의규정’에는 구체적인 회의 절차가 기록돼 있다. 수석대신이 개회를 선언하면 주무대신의 의안 설명과 토론을 거쳐 각 대신이 가부 표제(標題)를 마치고 수석대신이 이를 수합해 다수 의견에 따라 자기 의견의 표제를 마치고 폐회를 선언한다. 수석대신과 주무대신이 서명한 상주안(上奏案·정부 원안+토론 기록+가부 표제)은 어압(御押)과 어새(御璽)로 황제의 재가를 받아 관보에 반포된다.
 
을사늑약문이다. [뉴시스·문화재청]

을사늑약문이다. [뉴시스·문화재청]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주본(奏本)』(규 17703)은 이렇게 의정부 회의를 거쳐 황제의 재가를 받은 상주안의 묶음이다. 『주본』에는 을사늑약에 관한 상주안이 없다. 의정부 회의도 없었고 수석대신의 상주도 없었고 황제의 재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전후에 고종이 재가한 안건은 주본 제157호 ‘중추원 관제 개정 건’(1905.11.8), 제158호 ‘도량형 제조소 직제 및 실시국 직제 건’(1905.12.9)으로 그 사이 을사늑약에 관한 아무런 주본이 발견되지 않는다. 회의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주본』에 수록된 ‘중추원 관제 개정 건’은 을사늑약의 이해를 위해 중요한 자료다. 중추원은 갑오개혁기에 설치된 국정 자문기구였는데 중간에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려는 독립협회의 시도도 있었지만 대체로 유명무실했다. 그런데 칙령 제46호 ‘중추원 관제 개정 건’(1905.10.24)으로 인해 중추원은 ‘군국 중요사항과 법률 칙령의 제정과 개폐’를 심사하고 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렇다면 을사늑약 안건은 의정부 회의를 거친 다음에도 황제의 재가를 받기 전에 다시 중추원의 자문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앞서 전말 기사에서 참정대신 한규설이 어전회의를 열라는 하야시의 요구에 대해 정부회의로 결정할 문제라고 답한 것은 정확했다. 의정부 회의와 중추원 자문이 없이는 경운궁에서 이토가 어전회의를 빙자해 한국 대신들과 날밤을 지새우며 백날을 이야기해 봤자 한담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한국의 의정부 회의에 이토·하야시·하세가와는 입회권이 없는 인물이었고, 이토가 한국 대신에게 조약안에 대한 가부를 물은 것도, 또 그에 대해 한국 대신이 가를 말하든, 부를 말하든 의견을 밝힌 것도 회의로서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열리지도 않은 어전회의, 일본도 자인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17일 밤 늑약의 현장에 있었던 한국 대신 중에서 이완용·박제순·이지용·권중현·이근택이 사흘 후 연명 상소를 올렸다. 한국 대신들은 17일 일본 공사관에서 하야시와 조약안에 관해 쟁론을 벌였는데 권중현은 의정부 회의와 중추원 자문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결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하야시는 황제의 결재 한 번으로 끝날 문제라며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입궐했고 한국 대신들은 고종을 만나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한 다음 이토와 만났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이토가 참정대신에게 회의를 시작하라 해서 참정대신이 각 대신에게 각각 의견을 말하게 하자 이토가 끼어들어 어전회의 상황만 말하면 된다고 간섭했다. 이토는 한국 군신의 어전회의가 조약안에 대해 이미 결론을 냈고, 한국 대신들은 이토와 교섭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어전회의의 결정을 이행하러 온 사람이라 우겼다. 한국 대신들의 가부 의견도 이토가 판정해주었다. 사실 어전회의는 일본 측에서 조약안의 강제 타결을 위해 뒤집어씌우려는 개념이었다. 회의는 이토가 오기 전에 이미 끝났고, 이토는 회의 결론을 확인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17일 밤 이토와 한국 대신들의 협의가 회의로서 의미가 없음을 저들도 자인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어전회의는 열리지도 않았고, 열릴 필요도 없었다. 을사늑약은 무효다. 
 
한밤에 강탈당한 대한제국 외무부 관인
‘신민(新民)’은 1925년 5월 창간된 종합 월간지다. 순종의 인산(장례)에 맞춰 1926년 6월 나온 제14호에는 을사늑약 당일 야간에 외부(외무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회고하는 어윤적의 글 ‘광무 외교의 실제와 그 종막’이 실려 있다. 본래 일본군이 한국 외부에 와서 관인을 강탈했다는 것은 당시 한국 언론이나 중국 상하이의 영문지 ‘차이나 가제트(China Gazette)’에서 이미 언급했던 일이다. 일본 측은 그런 일이 없었고 외부대신 박제순이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두 시간 지나 외부에서 궁중에 관인을 보냈다고 변명했다.  
 
그런데 숙직을 섰던 어윤적에 따르면 이날 삼경(밤 11시~새벽 1시) 일본 공사관 통역관 마에다와 외부 고문 스티븐스의 수행원 누마노가 숙직실에 와서 박제순이 관인을 가져오라 했다고 했는데, 관인은 며칠 전부터 박제순이 한규설과 함께 조인 반대를 밀약할 때 차라리 관인을 뒤뜰 못에 던질지언정 날인하지 않겠다고 했고, 또 대신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바 없어서 외국인에게 함부로 내줄 수 없다고 거부하니 퇴거했다고 한다. 다만 자리에 함께 있던 교섭국장 이시영이 의아해서 궁중에 전화해서 박제순과 통화하고는 인장을 보내라는 연락을 받아 주사 편으로 보냈다고 한다. 러시아 파블로프가 극동군 사령부에 보낸 비밀 전문과 고종 황제가 러시아 차르에게 보낸 친서는 일본의 외부 관인 탈취를 사실로 간주했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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