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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누구를 위해 일하는 장관인가

중앙일보 2020.11.11 00:39 종합 34면 지면보기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귀를 의심했다. 여성가족부 장관의 말로는 상상조차 힘든 궤변이었다. 하급자 성폭력 혹은 성추행 의혹으로 낙마한 여당 출신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국민이 성인지 감수성을 학습할 기회”라고 칭했다. “권력형 성범죄가 맞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도 끝내 “수사 중이라 죄명을 규정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회피했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스스로 인정한 범죄마저 감싼 꼴이다. ‘피해자가 학습 교재냐’ ‘학습은 장관과 여당이 해라’ ‘장관은 사퇴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권 성 비위 감싸는 여가부 장관
피해자, 국민에 충격 준 잇단 궤변
여가부마저 최악의 위기로 몰아

사실 ‘이정옥 여가부’의 실망스러운 행태는 이뿐이 아니다. 박원순·오거돈 사건 때 마지못해 늦장 대응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해 ‘여당가족부’란 비아냥을 들은 참이다. 박원순 사건 피해자를 ‘피해 고소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미투 때 발 빠르게 비판 성명을 낸 정현백 전 장관 때와 비교된다. 하긴 그 일로 당시 여가부 대변인이 경위서를 썼다는 말이 있으니, 이번 느슨한 대응의 배경이 짐작 가기는 한다.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가 1년6개월의 솜방망이 처벌에 미국 소환이 불허됐는데도 여가부는 수수방관했다. “사법부 판결에 의견을 내는 게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반면에 기독교 단체와 야당 의원이 여가부의 초등학생 성교육 추천도서 ‘나다움 책’을 문제 삼자 논박 한 번 없이 즉각 회수를 결정했다. “나다움 책이 갈등 요소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장관의 말에 따라서다. 장관 머릿속에는 여권 인사를 감싸고, 법원이나 수사 당국의 뜻을 살피며, 생각이 다른 이들과는 갈등을 피하는 일밖에 없다는 얘기다. 역대급 ‘보신 장관’이다. 여가부 해체 청원이 10만 명을 돌파하자 장관은 “국민의 수용성 또는 이해 부족”을 원인으로 꼽았다.
 
여가부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 때 처음 정부 부처(여성부)로 탄생했다. 1980~90년대 지난한 여성운동의 결과였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 때 여성가족부가 됐고, 두 정부 아래서 호주제 폐지·가정폭력 특별법과 성매매방지법 제정 등의 굵직한 성과가 나왔다. 한때 여가부 폐지를 추진한 이명박 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1년 예산이 1조원 안팎, 정부 총예산의 0.2%에 불과한 미니 부처다. 일을 잘 못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예산 부족과 낮은 위상 등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여가부를 흔드는 이들이 있다. 기재부가 잘못하면 잘하라고 하지 해체하라고는 안 하는데, 해경도 아닌 여가부는 만날 해체 타령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 글에서 “20년 전 세계 언론과 해외 페미니스트들은 경제 기적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해낸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성평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여성부의 영어표기)’를 설립한 것을 극찬했다”며 그 후 “여가부가 적은 예산으로 힘들게 버티는 동안 세상은 그 부처에 또 다른 엄청난 과제들을 안겼다”고 지적했다. 아직도 요원한 성평등 문제에 심화하는 젠더 갈등, 저출산, 혐오 문화, 디지털 성폭력, 소수자·인권 이슈 등을 아울러야 한다는 얘기다.
 
안타까운 건 지금 ‘이럴 거면 여가부가 왜 필요하냐’는 실망과 분노의 목소리가 여성들 사이에서도 나온다는 점이다. 여성 의제를 거리와 온라인의 2030 영 페미니스트들이 이끄는 동안 여가부는 손 놓고 있는 것도 모자라 염장질을 하는 상황이다. 사회학자인 이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세 번째 여가부 장관. 정현백·진선미 두 전임 장관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깜짝 발탁’의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문재인 대선후보 지지모임인 ‘대구·경북 담쟁이 포럼’ 발기인, 참여연대 활동 정도가 눈에 띄는 이력이다. 여전히 가부장적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소수자보다 청와대를 바라보는 듯한 장관이 여가부를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자칭 페미니스트 정부에선 별일이 다 일어난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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