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수대] 증거인멸

중앙일보 2020.11.11 00:25 종합 33면 지면보기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하거나 위조 또는 변조한 증거를 사용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155조에 규정된 증거인멸죄의 정의다. 이 조항을 친숙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이명박 정부 당시의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이었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주범인 이들은 검찰 압수수색 직전 각종 자료가 저장돼 있던 사무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깡그리 지워버렸다.
 
당시 지원관실 주무관이었던 장진수씨가 악역을 맡았다가 덤터기를 썼다. 유죄 선고로 해직 위기에 놓였던 그는 지시자들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온 건 “평생 먹여 살리겠다”는 ‘영혼 없는’ 회유와 그 유명한 관봉(官封) 5000만원이었다. 장씨 폭로로 촉발된 2차 수사는 당시 정권 실세와 청와대 비서관, 지원관실 간부들의 줄기소 및 유죄 판결로 이어졌다.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관련 감사원 감사 및 검찰 수사가 옛 사건을 불러냈다. 감사원에 따르면 산업부 공무원은 상관 지시에 따라 청와대 보고 자료 등 444건의 자료를 삭제했다. 대통령, 장관, 청와대 비서관 출신의 공기업 사장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나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등 주요 혐의들과 비교해 보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수사팀 시각은 다를 수 있다. 딱 떨어지는 범죄 혐의자인 만큼, 수사 출발점으로 안성맞춤이라서다. 이들은 선순위로 소환돼 자료 삭제를 지시한 윗선의 존재 여부를 추궁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실마리가 잡히면 고구마 줄기처럼 위로 올라가면서 정권 차원의 경제성 조작 및 최종 지시자의 존재 여부 등 큰 그림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운이 따른다면 USB 한 귀퉁이에 백업해놓은 ‘보물’이나 장진수씨와 같은 내부고발자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9년 전 불법사찰 수사는 반쪽짜리였다. 나중에 장관으로 내려꽂힌 청와대 민정수석과 검찰 출신 청와대 비서관들, 그리고 ‘볼드모트’와 같은 ‘진짜 몸통’의 관여 정황과 의혹들이 무수히 제기됐지만, 검찰은 깔아뭉갰다. 그때를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는 ‘원뿌리’까지 시원하게 캐내길 기원한다. 법무장관의 줄기찬 과거사 반성 요구에 화답하는 차원에서라도 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