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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1선 착수’ 수수께끼…그래도 의연했던 신진서

중앙일보 2020.11.11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중국기사들에 둘러싸여 홀로 고군분투한 끝에 결승에 오른 신진서는 이렇게 말했다. “16강전과 8강전은 제가 고전하여 구경하시기 힘들었을 것 같다. 결승전은 조금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
 

커제가 1선 그 옆에 뒀다면 명장면
2국은 너무 강하게 두다 역습 당해

바둑팬을 향한 이 한마디는 마법과 같았다. 스무살 신진서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잠룡’ 신진서는 하늘로 날아오를 일만 남았다. 이제 한국바둑은 신진서를 앞세워 다시 일어설 것이고 그 무대는 바로 신진서 대 커제의 삼성화재배 결승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1위 신진서 9단과 중국 1위 커제 9단이 격돌한 2020삼성화재배 결승전은 수수께끼를 남긴 채 끝났다. 2대0으로 커제가 이겼고 우리 모두는 승부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신진서는 왜 1선에 착수하게 됐을까.”
 
신진서는 인터넷 세대다. 온라인으로 10초 바둑을 수없이 두며 성장했다. 마우스 미스일 확률은 없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터치패드 같은 기계적 문제라면 심판은 왜 개입하지 않았을까.”
 
엄격한 룰을 앞세우는 골프도 ‘의도하지 않은 볼 터치’에는 벌타를 부과하지 않고 티샷을 다시 한다. 바둑은 온라인으로 큰 승부를 치르는 게 올해가 처음이고 의외의 사고가 벌어질 수 있기에 이의신청이 가능하다.
 
신진서는 그러나 이의신청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신진서는 어려서부터 바둑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책임’이라는 인식으로 살아왔다. 그러므로 당황하면서도 바둑판 밖의 무언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럼 커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많은 팬들이 신진서의 1선 착점 바로 옆에 커제가 나란히 돌을 놓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 되었을 것이고 커제에겐 박수가 쏟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커제의 계시기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의구심을 품은 채 커제가 다음 한 수를 두는 순간 대국은 멈출 수 없게 됐다. ‘1선 사건’은 묘하다. 대회 사상 처음 보는 광경이 순간적으로 벌어졌고 순간적으로 지나갔다.
 
길고 긴 불면의 밤이 지나고 이튿날 2국이 시작됐다. 이 판은 다른 각도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 묻게 된다.
 
“2국은 크게 우세했는데 왜 역전당하고 말았을까.”
 
신진서는 종반이 강하다. 바둑은 한 살이라도 어릴수록 계산에 정밀한 법. 최근 박정환과의 승부에서도 반집 우세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신진서가 AI 계산서에 5~8집까지 우세한 것으로 나오는 바둑을 역전당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날의 충격 탓인가. 아니면 방심인가.
 
TV 해설을 맡은 유창혁 9단은 “신진서는 승부 기질이 강하다. 이세돌 9단과 비슷해서 유리하더라도 안전한 길보다는 최강으로 간다. 그게 가끔 위기를 부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진서는 ‘부드러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승부 세계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고 곡선이 직선을 이긴다. “신진서가 그런 유연함을 겸비한다면 분명 최강자가 될 것이다.” 유창혁의 말이다.
 
박영훈 9단은 결승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묘하고 억울한 승부였어요.”
 
1선 사건에 대해 신진서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전화를 걸지 않았다.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신진서는 이제 겨우 20세다. 억울했겠지만 그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존심을 지켰다.
 
물론 1선 사건 같은 게 없이 제대로 승부를 겨루고 그래서 우승컵까지 따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승부의 여신은 그런 일사천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1선 사건을 포함한 이번 결승전은 신진서에겐 통과의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약이 된다면 더욱 좋겠다. 커제를 위시한 대륙의 수많은 강자들을 제압하고 조훈현-이창호-이세돌의 뒤를 이어 세계최강의 자리에 오르는 길은 험난하고 험난하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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