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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동학개미라는 불편한 프레임

중앙일보 2020.11.10 00:33 종합 35면 지면보기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

1980~90년대에 주가가 급락하면 성난 투자자들이 증권사 객장으로 몰려가곤 했다. ‘내 돈 물어내라’며 애꿎은 직원들 붙들고 분풀이를 했다. 시세 전광판에 의자를 던지며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요새 같으면 기물 파손으로 경찰서에 붙들려 갈 일이다. 그때는 하락장에서 겪는 통과의례쯤으로 여겼다. 전광판이 몇 차례 부서지면, 견디다 못한 정부가 증시부양책을 발표했다.
 

‘애국자+약자’의 절묘한 조합
포퓰리즘 매달리는 현 정부로선
외면할 수 없는 세력으로 부상
주식투자와 애국은 관련 없는데

개인투자자를 개미로 칭하는 기사가 본지에 등장한 건 80년대 말이다. 개미는 작고 약하지만, 근면 성실하고 착한 이미지다. 처음엔 “내가 왜 개미냐, 사람 무시하느냐”는 항의가 있었다. 금세 개미가 꽤 괜찮은 별칭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좋은 이미지인데다 보호받아야 한다는 ‘약자 코스프레’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개미에 동학이 덧붙었다. 이른바 ‘동학개미’. 1894년 외세의 침략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운동을 빗댔다. 외국인투자자의 매도에 맞서 개인투자자가 주가를 떠받친다는 의미다. ‘애국자+약자’의 절묘한 조합이다. 이름을 너무 잘 지었다. ‘내 돈 물어내라’는 거친 전광판 시위가 20여년 만에 국민의 마음을 파고드는 쪽으로 한결 세련되게 진화한 셈이다.
 
동학개미는 경제위기 때 주가가 V자형으로 반등한 기억을 갖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증권주를 주당 500원에 사서 1만원에 팔았다는 전설 같은 무용담이 지금도 회자된다. 그 기억을 살려 올해 과감히 주식을 사들였다. 코로나 이후 개인 주식 순매수가 60조원에 달했다. 안타깝게도, 내 집 마련과 취직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동학개미 운동에 뛰어들었다. 빚을 내 투자한다는 걱정스러운 소식도 들렸다. 이 대목에서 문재인 정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다행히 주가가 반등해 큰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은연중에 우리 증시를 지켜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동학개미 운동은 명분을 살리고, 실리도 챙겼다. 해피엔딩인 줄 알았다. 잘만 포장하면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 급의 미담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번 웃고 넘어갈 동학개미라는 신조어가 사라지기는커녕 갈수록 하나의 세력으로 힘을 키웠다. 어느덧 ‘동학개미를 도우면 선, 힘들게 하면 악’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동학개미가 포퓰리즘에 매달리는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을 파고든 것이다. 아니, 문재인 정부가 이 프레임에 올라탔다. 동학개미 600만표는 군침 도는 황금어장이다. 게다가 핵심지지층인 30~40대가 많다. 외면할 수 없다.
 
지난 7월 기획재정부가 개인투자자에게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동학개미가 반발하자 바로 문 대통령이 나섰다. “개인투자자의 의욕을 꺾지 말아야 한다”며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때부터 동학개미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펴기 어렵게 됐다. 눈치 없는 기재부가 이번엔 양도세 대상을 종목당 10억원에서 3억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다시 난리가 났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해임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4만명을 넘었다. ‘동학개미 죽는데, 대통령은 뭐하나’라는 팻말을 들고 청와대 앞 시위도 했다. 동학개미를 구심점으로 개인이 어느새 조직이 됐다. 이번엔 대통령 대신 여당이 나섰다. 표 계산에 여념이 없는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너무 걱정 마시라”고 동학개미를 달랬다. 역시 관료보다 정치인이 눈치가 빠르다.
 
반대 논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동학개미가 양도세를 내는 게 지나친 부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1개 종목을 3억원 이상 갖고 있으면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 큰 규모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전체 투자자의 1.5%(9만여명)만 속한다. 적어도 개미는 아니다. 애국으로 분칠한 동학개미는 더더욱 아니다. 둘째, 이들 9만여명이 양도세를 피하기 위해 주식을 팔면 주가가 떨어져 동학개미가 손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어떤 것도 추진할 수 없다.
 
반발에 놀란 정부와 여당은 3억원으로 낮추는 것을 철회했다. 동학개미의 완승이다. 전리품으로 홍두사미(洪頭蛇尾) 홍남기의 어설픈 ‘사표 쇼’를 즐겼다. 동학개미 프레임 안에선 모든 논의의 초점이 ‘동학개미가 손해 봐선 안 된다’에 맞춰져 있다. 양도세 대상을 3억원으로 낮추는 근거가 무엇인지, 공정이라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건지, 세수 확대를 위한 꼼수는 아닌지 등 정작 중요한 논의는 뒤로 밀렸다. ‘내 돈 물어내라’던 90년대 전광판 시위와 다를 게 없다.
 
이쯤에서 개인투자자를 애국으로 포장하는 건 멈췄으면 한다. 주식투자가 애국이라면 정기예금은 애국심이 부족한 건가. 해외주식에 투자한 이른바 ‘서학개미’는 변절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각자의 사정이 무엇이든 동학개미는 시세차익을 기대하고 주식에 투자했을 뿐이다. 과실도, 책임도 개인의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혹자는 금모으기 운동과 비교한다. 금모으기는 대가를 바라지 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동학개미 운동은 대가를 바라고, 주식에 투자한 것이다. 성격이 전혀 다르다. 주식투자에 애국은 없다. 다들 좀 더 냉정하고, 솔직해져야 한다.
 
고현곤 제작총괄 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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