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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예술적 표현의 합리성과 완결성

중앙일보 2020.11.10 00:19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파·라·도, 이렇게 세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화음이 고요히 울린다. 그리고 단 하나의 음 ‘솔’이 그 뒤를 따른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사제였던 몬테베르디(1567~1643)의 ‘마리아 축일 미사’ 중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셋은 곧 하나이니”, 즉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셋’을 세 음으로, ‘하나’를 한 음으로 노래한 것이다. 헨델(1685~1759)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1부(예언과 탄생)에는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하게 되며…”라고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선율이 산처럼 솟구쳐 올라 굽이치다 낮아지고 한 음 주변을 오르내리다 머물기를 반복한다. 바흐(1685~1750)의 ‘요한 수난곡’ 첫 부분에 등장하는 목관악기 2중주는 시작하자마자 각자의 음역을 교차시켜 십자가를 악보에 은유적(cross)으로 새겨넣는다.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발레 음악 ‘봄의 제전’의 마지막 화음을 이루는 네 음 ‘레·미·라·레’의 영어식 표기는 D·E·A·D, 즉 희생의 제물로 선택된 소녀의 ‘죽음’이다.
 

표현대상의 음악적 비유와 상징
부끄러움은 변화를 향한 첫걸음
내 편의 박수갈채에 취하면 안돼

이렇게 ‘셋’과 ‘하나’를 음의 개수와 결부한 것이, 가사의 내용과 선율의 윤곽을 일치시킨 것이, 특정 단어를 악보에 시각적으로 구현하거나 음높이로 치환한 것이 우리 귀에 들릴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르네상스·바로크, 심지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곡가들은 이렇게 음악 외적 이유에 의존하여 음악적 상황을 결정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대체로 단어나 문장의 구체적 의미와 음악적 상황을 직관적으로 결부시켜 그 표현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동요 ‘산토끼’의 ‘깡총 깡총’과 결합된 부점 리듬이나 베토벤 ‘영웅 교향곡’ 중 장송곡 마지막 부분의 주선율이 목메어 흐느끼듯 뚝뚝 끊기는 것은 단어의 느낌이나 감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다.
 
반면 순 음악적 관점에서의 표현은 무엇이든 가능하니 그 선택의 폭이 넓다 못해 막연할 지경이다. 그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작곡가들은 대체로 선택의 여지를 극단적으로 제한한다. 바흐의 다성(多聲)음악을 살펴보자. 거의 모든 선율이 주제 선율에 포함된 단편의 재조합에 의한 것들이다. 즉, 주제 선율을 하나의 문장이라 할 때 이에 대응하는 모든 문장은 주제에 포함된 단어와 음절을 재조합하여 만든 것들이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는 말을 베토벤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안톤 쉰들러(1795~1864)의 기록을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운명 교향곡’ 1악장은 우리가 운명에 흠씬 두들겨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따따따 딴!’ 이 네 음의 쌓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이와 대비를 이루는 주제뿐만 아니라 다른 세 악장의 주제까지 모두 다 이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주제를 새로 만들기보다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부터 추출하는 것은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적 영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선택이다. 창조주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이브를 만든 것이 설마 자재가 부족해서이랴.
 
예술적 표현은 대중의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이렇게 ‘표현의 합리성’을 수반한다. 그 합리성은 ‘안될 것 없지?’라는 느슨한 기준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는 엄격한 기준을 통해 구축된다. 외람되지만, 기준의 엄격함과 예술성, 즉 표현의 합리성과 작품의 완결성은 비례한다. 그것이 예술가들이 겪는 고뇌의 근원이다. “사소한 것들이 완결함을 만든다. 하지만 그 완결함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미켈란젤로(1475~1564)의 말이다. 예술가들이 작품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이나 무대에 오르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은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동시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자존심의 발로다. 그러고 보니 불현듯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첫걸음이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1901~1987)가 “연습을 하루 쉬면 나 자신이, 이틀을 쉬면 비평가들이, 사흘을 쉬면 모든 청중이 알게 된다”고 말했듯이 자신의 오류나 부족함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먼저 안다. 더 부끄러운 상황이 오기 전에 남보다 앞서 느끼고 개선해야 한다.
 
객석 한편을 장악한 초대 손님들, 소위 ‘내 편’이 보내는 박수갈채에 취해 부끄러움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시나브로 뻔뻔함이 고개를 든다. 내 작품이, 아니 내 말과 행동이 늘 만족스럽고, 그렇기에 타인의 비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셋 중의 하나다. 무지하거나 오만하거나, 아니면 뻔뻔하거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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