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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스 차박, 불멍 NO 삼겹살 NO “차 바퀴 자국도 NO”

중앙선데이 2020.11.07 00:02 710호 16면 지면보기
지난 6월 경북 울진 불영계곡. ‘휴가지가 된 유배지’ 기사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깊고 푸른 계곡’을 기대하고 옛 36번 국도 공터에 차를 세웠다. 같은 마음에 이곳에 주차했다는 서현태(66·서울 성북구 길음동)씨와 말을 나눴다. 그는 기자에게 “뭐, 차 안에서 자면 되니까요”라고 말했다. 
 

현대차 '휠핑' 체험해 보니
텐트 없이 차 안에서 모든 것 해결
화기 안 쓰고 쓰레기도 되가져가

슬쩍 그의 SUV 안을 훔쳐봤다. 앞으로 허리를 굽힌 뒷좌석과 트렁크가 만든 1.5평 남짓한 작은 평원에, 간이 의자·탁자와 침낭·재킷 등이 든 박스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기자는 시큰둥해 했다. 하지만 거의 5개월이 지난 10월 하순, 기자는 서씨와 같은 ‘유목민’이 됐다. 

지난 10월 27일 강원도 강릉 남항진 해변의 해송(海松) 그늘에서 원용휘(왼쪽)씨와 김영철씨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잠시 앉아있다가 차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스텔스 차박’에 들어갔다. 김홍준 기자

지난 10월 27일 강원도 강릉 남항진 해변의 해송(海松) 그늘에서 원용휘(왼쪽)씨와 김영철씨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잠시 앉아있다가 차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스텔스 차박’에 들어갔다. 김홍준 기자

# 캠핑 인기 치솟으며 예약 경쟁
총성에 맞춰 스타트하는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산악회 후배 김영철(42·서울 강남구 일원동)씨는 캠핑 사이트에 들어가 바삐 마우스를 움직였다. 예약에 뜸을 들이는 사이(대체로 좋은 자리를 고르려다 망한다), 캠핑 사이트는 남의 차지가 된다. 주말은 물론 평일도 빠듯하다. 실제로, 평일인 지난달 26~30일 치악산 국립공원 금대에코힐링캠핑장의 사이트는 꽉 찼다. 오로지 자연 속에서 쉬고자 함인데, 캠핑은 경쟁이 됐다. 
 
단풍 아래 캠핑을 즐기려던 김씨는 결국 예약에 실패했다. 그가 노렸던 날짜가 낀 지난달 1일~18일 이마트의 캠핑용품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7% 증가할 정도로 캠핑 인기는 급상승 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여행 풍속도를 바꿨다. 이미 1년 전에도 대세라는 표현이 나왔지만, 비대면 여행의 대표 격인 차박(차에서 하는 캠핑)은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국내 최대 차박 동호회라는 네이버 카페 ‘차박캠핑클럽’ 회원 수만 봐도 그렇다. 코로나19가 본격화한 3월 9만 명에서 11월 현재 19만 명으로 급등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영철씨는 기자에게 SOS를 보냈다. 그는 이미 9월 중순에 기자에게 현대자동차에서 선보이는 차박 체험용 플랫폼 ‘휠핑(Wheel+Camping)'에 응모하도록 권했다. ‘더 뉴 싼타페’ ‘투싼(NX4)’ 등 두 개의 신형 차종 하나를 시승하며 차박을 할 기회였다. 덜컥, 당첨됐다. 기자보다 영철씨가 더 기뻐했다. 나중에 전해 들었지만, 지난달 10일부터 이달 1일까지 총 7차례(주말 4회, 주중 3회) 진행된 행사에 6000명이 응모했고, 140명이 당첨됐다. 무려 43대1의 경쟁률이었다.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차종 : 더 뉴 싼타페, 인수 시간 : 오전 10시 30분….’ 
 
27일 오전 9시 30분, 경기도 고양의 현대차 고양모터스튜디오 지하 4층. 직원들이 지난 주말 휠핑에 사용된 차량을 정비하고 있었다. 내가 몰 더 뉴 싼타페 차량을 손보던 직원은 “때가 때인지라 방역에도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잡듯 내부 청소까지 마쳤다. 다른 직원 대여 캠핑용품을 고객과 일일이 점검했다. 차는 정확히 오전 10시 30분에 스튜디오를 나섰다.
현대자동차 고양모터스튜디오 지하4층에서 한 전문업체가 현대차 차박 체험 플랫폼 '휠핑'에 사용할 차량 내부를 샅샅이 청소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현대자동차 고양모터스튜디오 지하4층에서 한 전문업체가 현대차 차박 체험 플랫폼 '휠핑'에 사용할 차량 내부를 샅샅이 청소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영철씨가 중간에 합승했다. 차박 경력 3년의 남기현(가명)씨가 이런 말을 했다. “차박 인기에도 그늘이 있다. ‘차박 성지’가 된 곳의 주민들은 다른 곳에서 산 상품의 쓰레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데 불만 갖기도 한다.” 그래서 차박 중에도 흔적을 안 남기는 ‘스텔스 차박’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흔적을 남기지 말자(LNT, Leave No Trace)' 운동의 차박 버전이다.

 
스텔스 차박의 원래 의미는 별도의 텐트나 쉘터를 설치하지 않고 순수하게 차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캠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불멍(화롯불 멍하게 쳐다보기), 캠핑의 메인행사인 취사는 안 한다. 영철씨와는 스텔스 차박을 하기로 합의했다. 쓰레기는 그대로 되가져오고 차박 장소 근처에서 식사하고 물품을 사기로 했다. 차박 장소 이용에 대한 작은 보답이다.
  

이날 오후 3시 30분 강릉 순긋 해변에 도착했다. 강릉시 홈페이지는 이곳을 ‘무료 주차, 무료 입장, 시설 이용료 없음, 상시 이용 가능’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미 차박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이웃한 사천 해변보다 분위기는 덜하다. 하지만 남기현씨는 “사천보다 순긋”이라고 말했다. 비할 수 없는 호젓함과 막강한 화장실을 이유로 들었다. 이미 차 한 대가 차박을 준비하고 있었다. 옆에는 ‘취사 및 텐트 설치 금지’라는 현수막이 쳐있었다. 강릉시 안현 주민센터로부터 취사와 텐트 설치는 할 수 없지만 주차는 가능하다는 확답을 받았다.
강원도 사근진 해변 주차장에 있는 차 중 일부가 뒷문을 열어 놓고 있다. 이들은 취사를 하지 않고 '차박'을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사근진 해변 주차장에 있는 차 중 일부가 뒷문을 열어 놓고 있다. 이들은 취사를 하지 않고 '차박'을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 환경과 법적 측면서 대안 모색 숙제도

차박 인기가 치솟자 민원 발생도 이어지고 있다. 포항시에서는 지난달 16일부터 차박이 성행하는 형산강 둔치 일대를 캠핑·취사·주차 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충남 공주보 주차장 입구에는 ‘이곳은 캠핑·차박·취사 등 금지구역입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평창 청옥산 육백마지기, 강릉 안반데기에서는 야영·취사를 금지하고 있다. 야영은 텐트뿐만 아니라 햇빛·바람 가림막(타프)을 치는 행위도 해당된다. 스텔스 차박은 취사도구와 텐트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픽=전유리 기자 jeon.yuri1@joins.com

그래픽=전유리 기자 jeon.yuri1@joins.com

오후 8시. 순긋 해변 옆의 사근진 해변 주차장에는 차량 뒷문만 개방한 채 차박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주차장에서는 당연히 취사·불멍도 생략이다. 약속대로, 우리는 주변 식당에서 조촐한 식사를 한 뒤 불 대신 바다만 바라봤다.
  
‘휠핑’에서 빌려준 장비에는 캠퍼들에게 필요한 몇 가지가 없다. 침낭·화로·스토브다. 현대차 관계자는 “휠핑은 안전과 환경을 고려해 화기류 사용을 지양하고 해당 지역 상권을 위해 현지에서 최대한 간단히 하는 식사를 추천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스텔스 차박을 결의하기 전, 현대차는 다 계획이 있었다.
차박 중 강원도 강릉 순긋 해변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성. 김홍준 기자

차박 중 강원도 강릉 순긋 해변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성. 김홍준 기자

28일 오전 7시 30분. ‘이웃집’ 부부가 서둘러 차를 정리하고 떠난다. 이유를 묻자 “출근해야죠”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처럼 퇴근-차박-출근 패턴으로 즐기는 사람도 늘고 있다. 영철씨도 오후 출근을 위해 강릉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백패킹이 그렇듯, 차박도 인구가 늘면서 환경과 법적 측면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게 차박 이용자들의 고민이다. 남항진 해변에서 만난 원용휘(26·경기도 안성)씨는 “차박 하려면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바퀴 자국도 남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울산바위를 스치고 미시령터널을 지나면서, 더 뉴 싼타페의 기어 단수가 올라갔다. 운전하느라 못 본 휴대전화에는 영철씨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내년에도 휠핑 같이 가요.’ 현대차는 “고객 의견을 반영해 서비스를 개선,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판 유목민'이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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