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독]5억 건네며 "금괴 달라"…직원은 보이스피싱 직감했다

중앙일보 2020.11.06 11:43
중앙포토

중앙포토

여보세요. 서울남부지검 ○○○ 검사입니다. A(64)씨 맞으시죠?
네. 검사님이 왜 전화를 하셨죠?
선생님의 은행 계좌가 대포통장 범죄에 연루됐어요. 계좌에 있는 돈이 범죄자에게 빠져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큰일 났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금융감독원 직원을 선생님 댁에 보낼 테니, 계좌에 있는 돈을 모두 수표로 찾아서 건네주시면 안전하게 보관하겠습니다. 주소가 어떻게 되시죠?
네, 감사합니다. 서울 강동구….
 
지난 5일 낮 12시. A씨는 이런 내용의 전화통화를 마친 뒤 서둘러 은행 계좌에서 5억원을 1000만 원짜리 수표 50장으로 인출해 집으로 가져왔다. 오후 1시가 되자 금감원 직원을 자처한 B(26)씨가 집을 찾아왔다. A씨는 “안전하게 보관해달라”며 그에게 돈을 건넸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표→금괴→현금…‘돈세탁’ 시도

A씨가 만난 사람은 금감원 직원이 아닌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범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 수금책인 B씨는 곧바로 서울 종로구의 한국금거래소 대리점으로 향했다. 수표를 금괴로 ‘세탁’할 목적에서다. 이후엔 금괴를 현금으로 다시 한 번 바꿔 해외에 있는 ‘콜센터(본거지)’로 송금할 예정이었다. 거액을 바로 현금으로 받기엔 부피가 커 여러 단계의 세탁을 거치려 했다.
 
금거래소 대리점 직원 김모씨는 수상한 느낌을 받았다. 30세도 안 돼 보이는 청년이 수억 원을 가진 것부터 이상했다. 더욱이 B씨가 “2억5000만원 어치를 달라”면서 5억원을 건네자 의심은 커졌다. 김씨는 “본인 돈 아니시죠?”라고 추궁했다. B씨는 “내 돈은 아닌데, 심부름으로 왔다”고 둘러댔다. 김씨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직감하고 은행을 통해 피해자인 A씨와 전화통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파악한 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B씨가 도망가지 않도록 대화를 이어가는 기지도 발휘했다. 
금괴(사건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금괴(사건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해외 본거지로 수사 확대

서울 종로경찰서는 이날 오후 2시 30분쯤 사기 혐의로 B씨를 현장 검거했다. 범행 금액 5억원도 압수했다. 경찰에 따르면 B씨는 무직 상태에서 구인 광고를 보고 보이스피싱 조직에 포섭돼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B씨의 여죄가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해외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본거지 등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금거래소 대리점 직원이 모른 척하고 매출을 올릴 수도 있었지만, 신고를 해줬다”며 “(직원에게) 감사장과 신고포상금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중앙일보에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여파로 매출이 줄어 금괴를 팔 수도 있었지만, A씨가 큰 피해를 보는 걸 막는 게 더 중요했다”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매년 증가세다. 최근 3년간 연간 발생 건수는 2017년 2만4259건→2018년 3만4132건→2019년 3만7667건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피해액도 2470억원→4040억원→6398억원으로 급증했다. 경찰 관계자는 "돈세탁에 금괴를 활용하는 범죄가 늘고 있어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