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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문화탐색] 공공미술의 공공성은 어디에

중앙일보 2020.11.05 00:12 종합 26면 지면보기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지금 설치 중인 건가요, 해체 중인 건가요?”
 

제2의 ‘슈즈트리’ 논란
시청 앞 첨성대 조형물
예술성-대중성 충돌에서
공공미술의 가치 찾아야

“해제 중입니다.”
 
“이 작품에 말썽이 좀 있었죠?”
 
“그랬죠. 허허.”
 
지난 10월 15일 서울시 공공미술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시청 앞 정류장에 내린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다가 서울도시문화전시관 앞바닥에 커다란 돌덩어리 세 개가 비닐에 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최근 논란이 된 첨성대 조형물(한원석 작 ‘환생’)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짐짓 모른 척하고 관리자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서울도시문화전시관 위에 설치되었던 이 작품은 성공회성당을 비롯한 주변 경관을 가린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다. 작품이 철거되는 과정에서도 서울시와 작가 간에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로 2017’ 개장 기념으로 설치됐다가 흉물 논란을 일으킨 ‘슈즈트리’. [연합뉴스]

‘서울로 2017’ 개장 기념으로 설치됐다가 흉물 논란을 일으킨 ‘슈즈트리’. [연합뉴스]

나는 이것이 바로 제2의 ‘슈즈트리’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2017년 서울역 앞의 ‘서울로 7017’ 개장 기념 이벤트로 설치된 황지해 작가의 ‘슈즈트리’가 흉물이라는 지적을 받고 9일 만에 철거되었다. 3만 켤레의 헌 신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설치 초기부터 시민들로부터 흉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진중권씨 등 전문가들은 작품을 옹호했고 대중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공공미술을 둘러싼 흉물 논란이 본격화된 것이다. 첨성대 조형물 역시 그 전철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서울시 공공미술 컨퍼런스는 서울 시민청 지하의 화상회의 스튜디오에서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모두 7명 연사의 발표와 토론이 있었는데, 해외 참가자들은 영상으로, 국내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함께 했으며 내용은 유튜브로 중계되었다. 이날 주제는 ‘변화된 문화 지형도와 공공성: 공공예술과 대중문화’였다. 그러니까 공공미술과 대중성의 관계를 다각도에서 짚어보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런데 주제를 받아든 나는 사실 좀 갸우뚱했다. 왜 ‘공공예술과 대중문화’인가. 변화된 문화 지형도 속에서 공공예술과 대중문화는 어떤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된 서울도시전시관 위의 첨성대 조형물. [사진 서울시]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된 서울도시전시관 위의 첨성대 조형물. [사진 서울시]

이 주제야말로 논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공공미술의 키워드는 공공성이지 대중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대중사회에서 대중성이 어느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가치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공공미술에서 대중성은 핵심 가치일 수 없다. 과연 변화된 문화 지형도는 공공성을 대중성으로 대체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나는 다른 참가자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논자들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어서 하나로 묶기는 어려웠다. 나는 ‘공공미술의 공공성을 찾아서: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그러니까, 나는 공공미술의 공공성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슈즈트리’의 예에서 보듯이 예술성과 대중성의 충돌 사이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쩌면 오늘날 대중성은 예술에서도 유일한 판관(判官)일는지 모른다. 그러면 공공미술도 그래야 할까. 나는 이것이 ‘슈즈트리’와 첨성대 조형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라는 말처럼 공공미술은 매일매일의 인기투표여야 하는가. 아니다. 반대로 질문해보자.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하는가. 민주주의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공공선(公共善)이며 공공선은 공공성(公共性)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공공성을 통한 공공선의 실현,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다. 따라서 공공선과 공공성을 추구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에 빠지고 만다.
 
공공미술은 예술을 통해서 공공선과 공공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미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사회를 ‘미적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며, 그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취향이 획일화된 대중사회에서 그것은 매우 지난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공미술이 ‘미적 공동체’를 통한 민주주의의 기획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슈즈트리’나 첨성대 조형물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성이냐 대중성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 둘 중 어느 하나에만 표를 던질 수 없다. 왜냐하면 공공미술은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어찌 보면 대립되는 가치들 사이에서 비로소 얼굴을 내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적 포퓰리즘이 아닌 예술 민주주의로서의 공공미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러한 가치들의 충돌과 논쟁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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