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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해외 여행 물거품 되니 꿈속에 나타난 비행기

중앙일보 2020.11.04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64)

차 한잔하러 온 이웃이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한 자락 흥얼거리며 푸념한다. [사진 pixabay]

차 한잔하러 온 이웃이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한 자락 흥얼거리며 푸념한다. [사진 pixabay]

 
“올해는 사는 게 재미도 없고 의미가 없어. 어디 가서 술 한 잔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있나, 어울려 화투를 칠 수 있나, 세상이 왜 이래.”
 
차 한잔하러 온 이웃이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한 자락 흥얼거리며 푸념한다. 나 역시 실속 없는 시간이었지만 2020년의 내 일상은 조금 달랐다. 올해는 적당한 시기에 휴가를 내어 3년 동안 열심히 모은 적금을 타 세상 한 바퀴 돌아볼 생각에 들떠 지냈다. 1월에 짧은 답사까지 다녀온 ‘동에서 서로 유럽 한 바퀴 기차여행’의 꿈. 그것이 코로나로 연기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흐지부지 취소되고 말았다. 곧 풀리면 떠나리라 기대하며 오늘까지 열정의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아쉽다.
 
‘내 나이 60대에,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가보리라~’ 그리하여 몇 년간 쥐꼬리 월급의 큰 액수를 툭 떼어내 근면이란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았고, 걷기 싫어하는 내가 하루 6000보 이상 걷기를 실행했다. 그날의 행선을 위해 여행 작가들이 발로 쓴 기행 서적을 찾아 읽으며 메모하고, 머리에 아무리 쑤셔 넣어도 안 들어가는 ‘여행용 비상 영어’ 문장 열 개를 외우려는 노력은 스스로 칭찬할만하다. 
 
이번에 느낀 건데 새삼 계획과 목표는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획은 글로 써서 붙여두기만 해도 되지만, 목표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나름 큰 그림을 그려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 나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비켜줄 생각을 안 하고, 어느새 10월도 지나갔다. 친구랑 해외 여행을 단념했다는 이야기하며 치맥을 먹고 들어와 누웠더니 오랫동안 쌓은 열정이 눈물이 핑 돌만큼 아쉽고 공허하다. 어찌나 아쉬웠던지 꿈속에서 비행기를 탔다. 여기서부터는 꿈 이야기다.
 
 코로나 사태로 온 세상이 흑백이다. 나는 밀입국자로 짐칸에 그것도 수화물이 가득 실린 한쪽 공간에 쪼그라져서 날아간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지만 그래도 친구랑 함께여서 기댈 수 있고 힘들어도 좋다. 어찌어찌 도착하니 또 숨어서 다녀야 하는 신세다. 숨겨진 숙소에 신발까지 들어 들어가 쉬어야 한다. 혼자서 잠시 숙소를 벗어나 뒷문을 나온다. 호화로운 정원이 펼쳐지고 환한 빛이 비치는 쪽문을 여니 아름다운 비경과 웅장함에 점점 깊이 빠져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너무 멀리 왔다.
 
꿈속에서 나는 밀입국자로 짐칸에 그것도 수화물이 가득 실린 한쪽 공간에 쪼그라져 있었다. [사진 pixabay]

꿈속에서 나는 밀입국자로 짐칸에 그것도 수화물이 가득 실린 한쪽 공간에 쪼그라져 있었다. [사진 pixabay]

 
다시 흑백이 된 길을 돌아오는데 멀리서 나를 따라오던 청년이 돈이랑 여권이 들어있는 어깨에 멘 가방을 날치기해 간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순간을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어린아이가 숙소를 가르쳐 주겠다며 따라 오라 하더니 이상한 사람에게 나를 인계한다. 순간 신발도 뺏기고, 걸친 잠바도 뺏긴다. 나는 홑옷만 입고 겨우 부끄러움을 감춘 인간으로 황야에 서 있다.
 
문득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경찰이 지나간다. 여권을 잃었을 때, 사건이 생겼을 때, 절대 외우지 못한 긴급 영어 몇 문장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꿈에서도 내가 나에게 놀라 감탄한다. 오래 걸어 피곤하지만 다리가 아프지 않다. 하루 6000보 걷기의 결과다. 물질은 다 사라져도 머리에 든 것과 건강이 있으니 무형의 재산이란 이런 것인가라는 일촌광음의 철학에 빠져든다.
 
물어물어 숙소를 찾아 돌아가기에 성공한다. 숙소 주인에게 같이 온 친구가 내 걱정을 하지 않았느냐고 되레 걱정하며 물으니, 친구랑 같이 왔냐며 며칠 만에 나타난 당신을 아무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살아서 돌아온 것에 감사하기로 한다. 서럽게 울며 방문을 여니 친구는 통닭에 버드와이저 맥주 한 병을 마시다 말고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순간, 진동 울리는 폰을 보며 아침부터 허튼 웃음을 웃는다. “어제 통닭에 맥주 한 병이 너무 아쉬워 아직도 술 생각난다”는 문자다. 어찌 이렇게 꿈이랑 연결이 되냐, 하하하. 가위눌린 힘든 꿈이라 그런가 온몸을 누가 때린 듯 아프다. 꿈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입술을 깨물었나 보다. 일어나 거울을 보니 입에서 피가 흐른다. 꿈 이야기를 하며 여행이 얼마나 힘든지 안가길 잘했다며 아쉬운 수다를 떤다.
 
살아가노라면 가슴 저 밑에 가라앉은 먼 여행의 그림이 언젠가는 용트림하며 다시 솟아오를 것이다. 내년의 10대 목표에 영어문장 10개 끝장내기와 6000보 걷기를 7000보로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끼운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에게 내일은 혁명하듯 새롭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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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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