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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고마워요 트럼프, 당신 덕분에…

중앙일보 2020.11.03 00:36 종합 31면 지면보기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현지 시각으로 오늘 미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실시됩니다. 4년 전 섣불리 당신의 낙선을 점쳤다가 망신을 당한 아픈 기억 때문에 이번에는 함부로 결과를 예단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당신은 여론조사의 열세를 극복하고, 역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졸린’ 조 바이든에게 패해 단임 대통령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지난 4년간 수고한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에게 감사할 이유가 많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세상을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선거의 엄중한 의미 일깨운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트럼프의 업적

당신 덕분에 한반도는 지난 4년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70대의 미국 대통령이 30대 중반의 북한 지도자와 그토록 끈끈한 ‘브로맨스’를 과시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수시로 당신은 김정은과 연애편지 같은 친서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습니다. 이념과 인종, 세대를 초월해 친구를 사귈 줄 아는 당신의 넓은 도량 덕에 우리는 화염과 분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북한의 핵무기는 좀 늘어났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요. 당신 말대로 임기 중 한반도에서 전쟁이 안 일어난 게 중요하지요. 당신이기에 가능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당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 덕분에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당신은 동맹을 유지하려면 정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우리에게 일깨워 줬습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단번에 다섯 배로 올리라는 당신의 통 큰 요구를 통해 미국의 도움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남에게 안보를 의존하는 비애와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낀 소중한 체험은 두고두고 우리에게 쓰지만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당신 덕분에 세상을 좀 더 폭넓게 보는 안목을 갖게 됐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워 당신은 국제 사회에서 발을 뺐지만, 미국이 없어도 세상은 굴러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미국의 빈자리가 크긴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정도는 아니란 것도 알았습니다. 미국이 리더 역할을 포기해도, 국제기구에서 탈퇴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대신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중국이 사실은 미국의 기술을 베끼고, 훔치고, 국제 질서를 짓밟는 나라라는 것도 당신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그런 중국이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신 덕입니다.
 
당신 덕분에 감염병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마스크도 없이 맨몸으로 코로나바이러스에 당당히 맞서는 결기를 보여줬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다 몸소 감염되는 수난을 당하고도 불과 며칠 만에 훌훌 털고 일어서는 당신의 모습에서 인류를 감염병의 위기에서 구하는 슈퍼맨의 기상을 보았습니다. 방역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투철한 소신으로 세계를 경제 위기의 나락에서 구한 것도 당신이니까 가능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전 세계 정치인들은 21세기 정치의 시작과 끝은 트위터라는 명료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주류 미디어가 쏟아내는 가짜 뉴스에 기죽지 않고, 트위터 하나로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기개를 보여준 당신은 진정 새 정치의 선구자였습니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며 ‘대안적 진실’도 있다는 걸 깨우쳐 준 사람도 당신입니다.
 
당신 덕분에 정치가 코미디보다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그것도 당신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틈만 나면 당신은 자학적 유머로 세상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리얼리티 막장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 팍팍한 일상에 큰 웃음을 선사한 당신이 인류의 정신 건강에 기여한 공로는 큽니다. 트럼프 당신은 군 통수권자이면서 개그 통수권자였습니다.
 
당신 덕분에 세상이 보다 평등해진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당신이 이끄는 미국에서 위안을 찾는 지도자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세상을 지속적인 하향 평준화의 길로 이끈 당신의 업적은 역사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가장 큰 공로는 단시간에 지도자 한 명이 나라를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줌으로써 선거의 엄중함을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만 해도 미국은 지도자 한 사람에 좌지우지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보다 제도가 지탱하는 나라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지만 4년 만에 그 믿음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분열하고 흔들리고 방황하는 미국은 더는 과거의 미국이 아닙니다. 심지어 선거가 무사히 끝날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됐습니다. 4년 전 미국 유권자들의 집단 지성과 시민 의식에 걸었던 기대가 배신당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다시 일말의 기대 속에 이번 선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난 4년 당신을 통해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고마워요, 트럼프. 다 당신 덕분입니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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