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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벽돌공 같은 직업" 막노동꾼에서 '원조' 007된 숀 코너리

중앙일보 2020.11.01 18:04
숀 코너리를 스타 배우로 만든 건 첩보영화 '007' 시리즈였다. 사진은 그가 마지막으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 촬영 중 포즈를 취한 모습. [AFP=연합]

숀 코너리를 스타 배우로 만든 건 첩보영화 '007' 시리즈였다. 사진은 그가 마지막으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 촬영 중 포즈를 취한 모습. [AFP=연합]

역대 가장 흥행한 첩보영화 시리즈 ‘007’의 1대 ‘제임스 본드’이자,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 숀 코너리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노환으로 별세했다. 지난 8월 25일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은 지 두 달여 만이다.  
BBC‧AP 등 주요 외신은 이날 그의 아들을 인용해 코너리가 “바하마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코너리의 아들은 성명을 통해 “아버지가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았다”면서 “오늘은 아버지를 알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에게 슬픈 날이며, 배우로서 그가 준 멋진 선물을 즐긴 전 세계 모든 이에게 상실감을 안겼다”고 애도했다.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 90세로 별세
007 제작진 "세상에 혁명 일으킨 배우"
69세 때도 '세기의 섹시한 남자' 꼽혀
'언터처블'로 1988년 첫 오스카 수상
'장미의 이름' '더 록'등에서도 활약

 

58년 전 최초로 "내 이름은 본드,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가 1992년 3월 독일 함부르크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이다. 당시 62세였다. [AP=연합뉴스]

숀 코너리가 1992년 3월 독일 함부르크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이다. 당시 62세였다. [AP=연합뉴스]

“내 이름은 본드, 제임스 본드.” 코너리가 58년 전 1편 ‘007 살인번호’에서 선보인 시리즈의 명대사다. 이 영화로 제작비 약 110만 달러의 50배가 넘는 전 세계 5900만 달러 수입을 올리며 그는 단숨에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007 위기일발’ ‘007 골드핑거’ ‘007 선더볼 작전’ 등 지금껏 개봉한 ‘007’ 영화 26편 중 일곱 편에 출연해 흥행성공을 거뒀고, ‘007’ 시리즈가 마블 히어로물과 ‘스타워즈’ 시리즈에 이어 역대 프랜차이즈 영화 흥행 3위에 오르는 초석을 다졌다. 지금껏 ‘007’ 시리즈의 세계 매출은 70억 달러에 이른다.  
현재 6대 다니엘 크레이그까지, 이 영국 비밀 첩보원 역을 거쳐 간 배우들은 많았지만 그는 절대적인 ‘원조’였다. 오죽하면 미국 유명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역대 제임스 본드를 “숀 코너리, 그리고 나머지”로 나눴을까. 그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는 타고난 기지와 신무기로 적을 희롱하고 매 작품 다른 ‘본드걸’을 유혹하면서도 신사다움과 유머를 겸비해 영웅주의와 쾌락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가 예순아홉이던 1999년까지 미국 연예지 피플이 선정한 ‘금세기 가장 섹시한 남자’에 꼽힌 데도 제임스 본드의 영향이 컸다. 
 

007 은퇴 선언 후에도 두 차례나 '강제 복귀' 

‘007 두 번 산다’(1967) 이후 시리즈 은퇴를 선언한 코너리는 1969년 2대인 조지 라젠비, 1973년 3대 로저 무어가 합류하고도 팬들의 성화에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으로 두 번이나 복귀하기도 했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제임스 본드의 신사다움, 섹시함, 터프한 면이 숀 코너리 안에 다 있다”면서 “이후의 제임스 본드는 부드러움을 강조한 로저 무어와 피어스 브로스넌, 터프함을 부각한 다니엘 크레이그 등 다 코너리의 변형”이라 설명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2013년 출범 100주년 기념 역대 영화 속 영웅 50인 순위에서 숀 코너리 표 제임스 본드를 ‘앵무새 죽이기’의 인권변호사와 인디아나 존스에 이어 3위에 올렸다.  
'007' 시리즈 1편 '007 살인번호'. 58년 전 서른둘 숀 코너리의 모습이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007' 시리즈 1편 '007 살인번호'. 58년 전 서른둘 숀 코너리의 모습이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007’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코너리가 “너무 발육된 스턴트맨” 같다며 못마땅해 한 건 전설이 된 지금은 웃으며 회자하는 일화다. 당시 ‘007 살인번호’의 제작자 앨버트 R 브로콜리는 키 190cm의 이 무명 배우에게서 두둑한 배짱을 알아봤다. 그렇게 ‘007’은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노동자계층 출신으로 영국 해군 제대 후 닥치는 대로 밥벌이를 하던 코너리가 전업 배우로 자리 잡게 한 전환점이 됐다. 
 

가난 탓에 우유배달, 관 닦기…영국 해군 입대도

코너리는 193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소부, 아버지는 트럭운전, 공장일을 전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학교를 그만둔 그는 우유배달,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1946년 열여섯에 영국 해군에 입대했지만, 위궤양으로 3년 만에 제대한 후엔 고향에 돌아와 벽돌공, 인명 구조원, 관 닦기, 미술과 학생들을 위한 누드모델 등을 했다. 취미로 하던 보디빌딩으로 1953년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 3위에 오르면서 모델과 배우 일을 얻기 시작한 그해엔 스코틀랜드 아마추어팀에서 축구를 하다 월등한 체격과 볼 감각 덕에 스타 축구감독 맷 머스비에게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이미 스물셋이던 그에게 당시 영국 프로축구 선수는 급료도 짜고 30대면 노후 걱정을 해야 할 만큼 활동 기간도 짧았기 때문이다. 
 숀 코너리(가운데)가 1966년 '007 두 번 산다' 속 일본식 목욕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현장 모습이다. [AP =연합]

숀 코너리(가운데)가 1966년 '007 두 번 산다' 속 일본식 목욕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현장 모습이다. [AP =연합]

생존이 급한 그에게 배우가 안 될 뻔한 순간은 차고 넘쳤다. 훗날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배우 일은 내게 벽돌공 같은 직업이었다”고 회상했다. 스크린 데뷔작은 1954년 영국 영화 ‘봄에 핀 라일락’이다. 엔딩크레디트에도 없는 단역이었다. 이후 TV 영화 등에서 땅에 발붙인 거친 역할을 주로 했다. 서른둘에 만난 제임스 본드는 이 야생마 같은 배우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배우 일은 내게 벽돌공 같은 직업" 

그는 결코 ‘007’의 그림자에 갇히길 거부했다. 시리즈 출연 중에도 알프레드 히치콕의 ‘마니’, 시드니 루멧의 ‘힐’, 존 휴스턴의 ‘왕이 되려던 사나이’ 등 명감독과 함께하며 본드의 그림자를 부단히 거둬냈고, 1988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처블’에서 정의롭게 순직하는 경찰 역할로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남우조연상)를 안았다. 10대 후반부터 찾아온 탈모를 제임스 본드 이미지 탓에 감춰오다 시원하게 공개한 게 이즈음이다. ‘장미의 이름으로’ ‘붉은 10월’ 등 묵직한 작품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한편, ‘오리엔트 특급살인’ ‘더 록’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 ‘로빈 훗’ 등 대중영화의 카리스마 넘치는 조역으로 다양한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인생 2막을 열었다.  

1988년 숀 코너리가 영화 '언터처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AP=연합]

1988년 숀 코너리가 영화 '언터처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AP=연합]

2006년 그의 배우 은퇴 선언의 이면에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그가 2003년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마법사 간달프 역할을 제안받았지만 “원작 소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액션영화 ‘젠틀맨리그’를 택했는데 이 영화가 제작자들과 심한 갈등 끝에 흥행까지 실패한 반면, ‘반지의 제왕’은 큰 성공을 거둔 영향도 있었다는 것이 하나다. 또 2006년 전 부인이 자서전에서 그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잡지 플레이보이 등 인터뷰에서 “여성을 때리는 것이 특별히 잘못이라 생각지 않는다” 말한 예전 발언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코너리는 전 부인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영국 기사 작위 받았지만…스코틀랜드 독립 지지

코너리는 2000년 예순아홉에 에든버러 홀리루드 궁전에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지만, 평생 고향 스코틀랜드 독립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몸에 ‘스코틀랜드 영원히(Scotland Forever)’란 문신을 새겼을 정도다. 미국인, 러시아인, 이집트인, 아일랜드인 등 어떤 국적의 캐릭터를 연기하든 스코틀랜드식 영어를 구사해 평단에 비판받았지만 끝내 억양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일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가 스페인, 바하마, 뉴욕 등 해외에서 살아왔으면서 강경한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것을 꼬집기도 했다.  
숀 코너리가 뉴욕에서 2013년 US 오픈 테니스 챔피언십을 참관하는 모습이다. [EPA=연합]

숀 코너리가 뉴욕에서 2013년 US 오픈 테니스 챔피언십을 참관하는 모습이다. [EPA=연합]

코너리의 별세가 알려지자 스코틀랜드 니컬라 스터전 제1 장관은 “오늘날 우리나라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 중 한 명을 애도한다”면서 코너리를 “애국적이고 자랑스런 스코틀랜드인”이라 경의를 표했다.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는 ‘007’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그가 “시대와 스타일을 정의했다”면서 “영화의 진정한 거장 중 하나”라 기렸다. ‘007’ 제작자 마이클 G 윌슨과 바바라 브로콜리 역시 공식 계정을 통해 “그는 섹시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비밀요원을 까칠하고 재치있게 묘사해 세상에 혁명을 일으켰다. 의심할 여지 없이 (007) 시리즈의 성공에 큰 공이 있으며 그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라 남겼다. 배우 휴 잭맨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나는 숀 코너리를 우상처럼 여기며 자랐다”면서 “스크린의 전설, 영면하길”이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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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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