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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국가가 죽이고 암매장, 내 동생 찾아달라"

중앙일보 2020.10.31 05:00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돈 많이 벌어서 엄마 고생 안 하게 해주고 싶어. 내가 가는 데는 연락이 안 돼. 전기가 안 들어와서 호롱불 켜고 생활하고 깊은 산속에서 훈련한대. 누나 잘 있어. 엄마한테 자주 가 보고.”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⑮유가족 그리고 기간병의 눈물

제가 결혼한 직후인 1968년 어느 날, 남동생이 찾아와 “나 이상한 군대에 간다”며 한 말입니다. 한 달에 월급만 150만 원(당시 9급 공무원 월급 1만550원)을 받는다며 “이왕 가는 군대, 돈 많이 주는 곳으로 가겠다”는 거였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안돼, 가지 마”라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남동생은 “내가 안 가면 나랑 식구들까지 다 죽인대”라고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곤 차려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떠났습니다.
 
남동생이 떠난 후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정화수를 떠 놓고 남동생의 무사 귀환을 빌었어요. 늦은 밤에도 개가 짖으면 어머니는 “남동생이 왔다”며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습니다. 우리 집 개가 남동생을 많이 따랐거든요. 그런데 어이없게도 경찰서에서 남동생의 군대 입영통지서를 들고 오곤 했습니다. 숨어있는 것 아니냐며 야밤에 들이닥치기도 했고요. 5년쯤 후부턴 그마저도 끊겼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끝내 남동생을 다시 보지 못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눈을 뜬 채로요. 우리 가족이 ‘남동생이 실미도 부대 공작원이었다’는 걸 안 건 2000년대 중반이 돼서입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동생에 대해 조사를 하겠다며 연락이 와서 그때야 알게 됐습니다. 남동생이 “군대 가겠다”며 나간 지 40여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돈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남동생 시신을 찾아주기만 해달라는 겁니다. 제발.(김병염 공작원의 누나 김○○씨)

“국가가 시신이라도 돌려달라”

실미도 부대 공작원 유족들은 2013년부터 매년 8월 23일에 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의 육군 11보급대대에서 위령제를 연다. 이날은 1971년 공작원 24명이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 대방동까지 진출했다가 경찰과 군에 막히자 총격전 끝에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날이다. 이날 실미도를 탈출하며 또 대방동 버스 안에서 숨진 공작원 20명의 유해는 11보급대대 봉안소에 안치돼 있다.
 
하지만 김병염 공작원 등 사건 당일 숨지지 않은 생존 공작원 4명의 시신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군은 대방동 사건 직후 김 공작원 등 4명을 초병 살해 혐의로 군 법정에 세웠고, 사형 선고를 받은 4명은 이듬해 3월 10일 사형당한 뒤 어딘가에 비밀리에 매장됐다. 군은 사형 후 가족들에게 시신을 인계해야 했지만, 일체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김 공작원의 누나는, 실미도 사건 50년을 앞둔 이제라도, 동생의 시신 혹은 시신이 묻힌 곳이라도 알려달라고 국가에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형 공작원의 유족들 역시 한목소리로 “제발 유해만이라도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8월 23일 육군 11보급대대 봉안소에 마련된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의 제삿상. 우상조 기자

8월 23일 육군 11보급대대 봉안소에 마련된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의 제삿상. 우상조 기자

 

공작원들 죄수 출신 아냐…“명예회복 절실”

실미도 공작원 가족들은 또 자신들의 아들들은 사형수나 무기수 같은 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임성빈 공작원의 여동생은 “많은 사람이 실미도 공작원을 아직도 사형수나 무기수여서 입대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며 “실미도 사건 50년을 앞두고 꼭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식 공작원의 남동생도 “우리 형은 실미도에 들어가기 전 다른 부대에서 부사관(하사)으로 일하며 박정희 대통령 표창을 받을 만큼 모범적인 군인이었다”며 “죄수 출신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족들의 주장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조사에서도 확인된 사실로 공작원 대부분은 죄수가 아닌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실미도 사건을 다룬 일부 소설과 영화에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공작원들을 사형수 출신으로 그렸지만 사실과 다른 것으로 조사됐다.
 
8월 23일 실미도 부대 공작원 위령제에 참석한 유가족들. 우상조 기자

8월 23일 실미도 부대 공작원 위령제에 참석한 유가족들. 우상조 기자

 

유족들은 분노·자책·회한…50년 한 풀어줘야  

유가족들은 반세기 가까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3~5월 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 암매장 공작원 4명의 유가족 5명을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한 결과 3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나머지 2명은 만성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족들이 대체로 우울감과 분노에 휩싸여있고 그 밑바닥에는 풀리지 않은 억울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작원들은 국가의 징집으로 실미도 부대에 입대했고, 감금당한 채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또 국가에 의해 이유도 모른 채 버림받고 끝내 죽음에 내쳐졌다. 국가가 이런 문제의 해결을 방치하는 사이 유족들은 자책과 회한 속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실미도 잊고 싶다”…기간병도 피해자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잊고 싶은 것은 군 생활이다. 나는 실미도 사건이 너무 두렵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잊고 싶은 두려움은 과거 죽은 자들의 망령이다. 실미도 생존과정을 나는 잊고 싶다.”(한 생존 기간병의 문장완성 검사 입력 내용) 

 
공작원들을 훈련한 기간병들 역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실미도 부대에서 1971년 8월 23일 사건 당일 살아남은 기간병은 10여명이다. 10명을 검사했더니 6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고 그중 4명은 중증이었다. 기간병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고, 실미도 부대에서 동년배의 젊은이를 가혹하게 폭행하고, 또 동료들이 피 튀기며 숨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생존 기간병들이 우울감에 시달리는 근간에는 죄책감이 깔려있다는 게 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의 진단이다.
 
기간병들은 또 자신들을 가해자로 인식하는 사회적 시선에 억울함과 분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존 기간병 중 7명은 ‘외상적 사건의 침습’ 증상을 보이고 있다. 사건이 방금 전 일어난 것처럼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 이들은 사건을 연상케하는 군부대 등을 피하고,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걸 불편해한다. 자다가 악몽을 꾸고 깨거나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놀라 사람을 피하곤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8월 25일 실미도 야산의 한 우물. 실미도 부대가 훈련 당시 사용했다. 중앙포토

8월 25일 실미도 야산의 한 우물. 실미도 부대가 훈련 당시 사용했다. 중앙포토

 
신동근 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과 기간병은 모두 피해자로 보인다”며 “국가 차원에서 이들을 피해자로 널리 알려 위로하거나 추모관 설립 등을 통해 넋을 달래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충분한 경제적 보상도 대안이라는 조언이다.

 
김민중·심석용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지난 기사〉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
https://news.joins.com/issue/1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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