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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얼쉰 ‘이마제마’ 포석…장쭤린에게 만주군 통솔권 일임

중앙선데이 2020.10.31 00:21 709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9〉

장쭤린(왼쪽)은 일본의 동북진출에 협력과 반목을 병행했다. 오른쪽은 일본 공사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 1928년 5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장쭤린(왼쪽)은 일본의 동북진출에 협력과 반목을 병행했다. 오른쪽은 일본 공사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 1928년 5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만주에서 마적(馬賊)은 묘한 직업이었다. 부업인 사람도 있었지만 본업이 더 많았다. 농가나 상가에 자금유통이 빈번한 가을에서 이듬해 2월까지가 대목이었다. 봄바람이 불면 두목은 부하들에게 수입을 분배하고 초가을까지 휴식에 들어갔다. 쉬는 기간 마적들은 부업을 찾았다. 노동이나 음식점 종업원, 지주 집안 잡무 처리, 사창가 심부름꾼 등 하는 일도 각양각색이었다. 교사나 경찰도 있었다.
 

장쭤린의 투항 처음엔 반신반의
마적들 귀순시키자 의심 풀어

독립 선포한 혁명군 진압 임무
2000명 소탕, 새 권력 출현 예고

2년 전 타계한 하얼빈(哈爾賓) 출신 대만 작가 리아오(李敖·이오)의 회고를 소개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엄마 손 잡고 구걸 다녔다. 13살 때 먹고살기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 60년간 마부, 노동자, 농민, 딱딱이(야경꾼), 묘지기, 토비(土匪), 경찰, 금은방 주인을 했다. 장비(張飛·장비)가 즐겨 쓰던 장팔사모(丈八蛇矛) 비슷한 무기 들고 가끔 몇 달씩 없어졌다 나타났다고 들었다.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전형적인 마적이었다.”
  
농사일 끝난 마적들 부업으로 생계
 
장징후이(왼쪽)는 장쭤린 사망 후 일본에 투항했다. 만주국 총리 시절 일본이 난징에 세운 친일정부 주석 왕징웨이(汪精衛)와 회담하는 장징후이. 1942년 5월, 신징(新京). [사진 김명호]

장징후이(왼쪽)는 장쭤린 사망 후 일본에 투항했다. 만주국 총리 시절 일본이 난징에 세운 친일정부 주석 왕징웨이(汪精衛)와 회담하는 장징후이. 1942년 5월, 신징(新京). [사진 김명호]

할머니에게 들은 장쭤린(張作霖·장작림)에 관한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장쭤린은 1896년 토비에 투신했다. 작은 키에 체격도 부실하다 보니 두목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인질 감시만 시켰다. 여자 인질은 돈 들고 찾으러 오지 않으면 죽여버리거나 두목이 데리고 살았다. 장쭤린은 천성이 나쁘지 않았다. 여자까지 인질로 삼는 것 보고 토비 생활을 걷어치웠다. 마적에서 출발해 만주를 휘어잡고 천하에 군림하기까지 장인과 부인의 도움이 컸다.”
 
마적들은 가정 이루기가 불가능했다. 부업에 종사하는 동안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부인들은 남편의 본업이 뭔지를 잘 몰랐다. 실종되거나 불행한 일이 발생해야 짐작할 정도였다. 남편이 없어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였다. 간 큰 여인들은 해 질 무렵 진한 화장하고 나갔다가 새벽이슬 맞으며 돌아왔다. 평범한 아낙들은 개나리꽃 피기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장쭤린은 장인이 지주였다. 집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주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은 장쭤린의 남다른 환경을 높이 샀다.
 
1933년 2월, 러허(熱河)를 시찰 나온 행정원장 쑹즈원과 만주의 수뇌들. 앞줄 오른쪽부터 탕위린, 쑹즈원, 장쉐량, 장쭤샹. [사진 김명호]

1933년 2월, 러허(熱河)를 시찰 나온 행정원장 쑹즈원과 만주의 수뇌들. 앞줄 오른쪽부터 탕위린, 쑹즈원, 장쉐량, 장쭤샹. [사진 김명호]

자오얼쉰의 통치방법은 마적을 이용해 마적을 제압하는, 이마제마(以馬制馬)였다. 장쭤린의 귀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충심을 시험할 필요가 있었다. 귀순 1개월 후, 토비 토벌을 지시했다. 장쭤린은 마적시절 자신에게 허리를 굽힌 장징후이(張景惠·장경혜), 장쭤샹(張作相·장학상), 탕위린(湯玉麟·탕옥린)까지 귀순시키고 나서야 시험에 통과했다. 부하가 늘어나자 밑으로 오겠다는 마적 두목들이 늘어났다. 장쭤린은 치밀했다. 무장을 해제하고 오는 마적들만 받아줬다. 순식간에 병력이 늘어나자 자오얼쉰은 장쭤린의 보험대에 경찰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했다.
 
당시 만주의 마적집단은 진쇼산(金壽山·김수산), 펑더린(馮德麟·풍덕린), 두리싼(杜立三·두립삼)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장쭤린의 귀순으로 만주의 마적세계는 긴장했다. 일본과 가까웠던 펑더린도 자오얼쉰에게 귀순을 타진했다. 조건이 까다로웠다. “매월 기밀비 1만 냥을 지급해라. 병력의 제한을 두지 마라. 지도와 감독은 받아들일 수 없다.” 자오얼쉰은 강경했다. “병력을 감축하고 기병대를 보병대로 개편해라. 감독할 관원 파견을 수용해라. 기밀비 지급은 동의한다. 단, 세금 징수권은 줄 수 없다. 관군으로 임용한 후 모든 직무는 셩징장군(盛京將軍)이 결정한다.”  
  
펑더린 자녀들 친자식처럼 챙기기도
 
만주의 대도시에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 군인만 상대하는 퇴폐 이발소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사진 김명호]

만주의 대도시에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 군인만 상대하는 퇴폐 이발소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사진 김명호]

일본이 중재에 나서자 자오얼쉰은 마지못한 듯이 펑더린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펑더린은 장쭤린보다 7살 위였다. 서로 호형호제하면서도 만날 때마다 긴장했다. 주머니에 숨긴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은퇴 후 교육사업에 투신하다 세상도 일찍 떠났다. 장쭤린은 펑더린의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챙겼다. 장쉐량과 동갑인 펑의 장남이 세운 대학에 거금을 지원했다.
 
진쇼산의 귀순 과정은 장쭤린이나 펑더린에 비해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귀순 후에도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 기녀들에게만 인기가 있었다. 관비(官匪) 토벌이라는 기상천외한   명분을 내건 장쭤린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두리싼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 편을 드는 바람에 귀순할 기회를 놓쳤다. 랴오허(遼河) 양안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해 마상황제(馬上皇帝) 소리 즐기는 것도 잠깐, 장쭤린의 계략에 넘어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에서 혁명군이 들고 일어났다. 1개월 후 14개 성이 독립을 선포했다. 만주도 들썩거렸다. 헤이룽장(黑龍江)성 순시 중이던 총독 자오얼쉰은 혁명 소식을 접하자 펑톈(奉天)으로 돌아올 준비를 서둘렀다. 측근들이 반대하자 찻잔을 집어 던졌다. “혁명은 적의 최고 지도자가 도망가면 성공한다. 동3성은 청 황실의 발상지다. 나는 청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이다. 반역자들을 처단할 의무가 있다. 장쭤린에게 전보를 보내라.”
 
펑톈 교외에 대기하던 장쭤린의 대병력을 사열한 자오얼쉰은 흐뭇했다. 엄청난 지시를 했다. “만주의 군 통솔권을 네게 일임한다. 혁명파들을 소탕해라.” 이 한마디는 만주에 새로운 권력자의 출현을 예고하고도 남았다. 장쭤린은 평소 못마땅했던 마적 출신들까지 포함해 2000여 명을 저승으로 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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