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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야만으로 되돌아가는 문명 사회

중앙일보 2020.10.30 00:15 종합 26면 지면보기

문명에 절망한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

알렉상드르 뒤누이가 1770년 리옹 근처의 로슈코르동 공원에서 사색하는 루소의 모습을 그렸다. [사진 위키미디어]

알렉상드르 뒤누이가 1770년 리옹 근처의 로슈코르동 공원에서 사색하는 루소의 모습을 그렸다. [사진 위키미디어]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계몽주의 사상가다. 그는 음악이론가·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음악의 본성에 관하여 그가 촉발한 논쟁(부퐁 논쟁)은 지금도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장이(Le Devin du Village)’는 오랜 기간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소설가로도 명성을 날렸고, 말년에는 식물학에도 관심을 가져 전문가를 무색하게 하였다. 주체할 수 없는 재능이 사방에서 빛을 발하는 천재의 이미지가 그에게 들어맞는다.
 

양심이 이성을 만나 도덕률 구성
도덕률은 정의 실현 의지 낳아
경쟁의 문명에서 나락에 빠져들어
한국, 루소의 비판에 귀 기울여야
내로남불은 인간 존엄에의 도전

루소는 모든 이들이 미래에 대한 장밋빛 그림을 그리던 때에 절망한다. 문명이 선하게 태어난 개인들로부터 진실성을 빼앗아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더 이상의 타락을 막기 위하여 제시된 그의 이론은 당시의 자유주의뿐 아니라, 후에 사회주의와 공화주의의 발전에도 깊은 영향을 남긴다. 여러 사조를 통하여 루소의 충고를 시험한 지금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을까?
  
인간의 자산: 동정심·양심·이성
 
장 자크 루소

장 자크 루소

루소는 인간이 동물의 왕국의 일원임을 인정한다. 식욕과 성욕을 만족시키며 자신과 종족을 보존하려 한다.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웃을 약탈하지는 않는다. 동정심이 그 길을 가로막는다. 타인의 고통이 내 것으로 느껴질 때, 내 작은 이익을 위하여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동정심이 이기심을 통제하여 동물들과의 이별을 준비시킨다.
 
신이 준 자산인 동정심만으로는 동물의 왕국에서 벗어나기에 역부족이다. 동정심은 여전히 본능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과학적 연구는 루소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고릴라·침팬지 등의 영장류들 모두 이 능력을 갖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 공감과 동정심은 나와의 거리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밝혀졌다. 나와 가까운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지만, 나와 대립적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는 공감은커녕 때로 고소해 하기도 한다. 아직 보편적 도덕이 열리지 않는다.
 
도덕과 인륜의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것은 양심과 이성의 몫이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나와 먼 사람은 비판하면서, 가까운 사람은 눈감아 주는 것에 대하여 불편을 느낀다. 양심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나와의 관계를 초월하여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느낌과 판단을 겸비한 이러한 상태가 양심이다. 양심이 이성을 만나 도덕률이 구성되고, 도덕률은 정의감을, 정의감은 정의를 실현해야겠다는 의지를 낳는다.
  
실락원
 
신은 인간에게 동정심과 이성을 부여하여 질서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한 길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문명사회는 낙원으로의 길을 가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루소가 생각한 과정은 이렇다. 떠돌기를 멈추고 농경사회에 정착하며 성적 대상을 찾기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 타인들에게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가가 중요해진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에 의하여 판단하게 되어 결국 자신의 본연의 진실한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타인과 경쟁하며 남들 눈에 비친 모습에 몰두하면서 경쟁 대상자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데에 집착한다. 타인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문화의 시작이다. 경제력이 인간의 지배-피지배의 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고 인간은 낙원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낙원에서 멀어진 곳에서 보편적 도덕성은 말할 것도 없고, 동정심마저 힘을 잃어간다. 양심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배려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이성은 개인의 이해와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작동한다. 극장에 들어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자신들의 본능적인 동정심을 한껏 해소하고는, 실제의 인간관계에서는 사악하게 행동하며 동정심은 현실세계의 뒷방으로 밀려난다.
  
일반 의지
 
경쟁의 논리에 밀려 개인들이 진실한 모습을 상실하고 지배와 억압이 판치는 현실, 야만적 결과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자유로운 공동체 구성원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동선을 바라는 의지를 갖고 있다. 루소는 이를 일반의지라고 부르며, 일반의지가 법을 통하여 제도화되어 효과적으로 운영될 때 조화로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의지를 반영한 일반의지, 또 그를 제도화한 법에 복종한다. 각 개인의 의지가 일반의지로 반영이 되고, 일반의지가 법에 의하여 구현되는 질서 있는 사회에서는 개인의지와 일반의지 사이에 갈등이 없다. 정의의 관점에서나 개인적 이득의 관점에서나 법을 준수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보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법은 나를 지배하는 외부 세력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나의 도덕적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법에의 복종은 자유와 매끄럽게 조화된다.
 
루소는 질서있는 사회가 형성되기 위하여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고 한다. 각 개인은 충분히 이성적이고 덕을 갖추어 법이 부여하는 제약을 수용하고 일탈하지 않을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 이해관계에 의하여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한 분파가 자신들의 의지를 국가 전체에 강요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으로 가는 우리 사회
 
인간과 사회에 대한 루소의 분석, 그리고 그의 비판이 300년 전의 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루소가 걱정한 야만상태가 더 심해져 있어, 그가 오늘 한국사회를 방문할 수 없는 것이 다행이다. 문명사회의 비극을 지적하고, 그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법까지도 제시하였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가 걱정한 모습들이 오히려 확대되어 나타나 있으니 말이다.
 
집단으로 파편화되어 개인의 이성은 양심에서 출발하여 일반의지를 구성하는 초월적 능력을 상실하고, 타 집단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이성이 정파적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가 되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을 동물의 왕국에서 건져내 줄 것으로 믿었는데 오히려 인간을 동물의 왕국으로 회귀시키고 있다.
 
루소는 요새 화두가 되는 내로남불에 대하여 무어라 할까? 이성이 자신의 정파적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구차한 논리를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자신과 타인에게 다른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양심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도덕 판단을 내릴 때 경고음을 울리는 이성의 푯대다. 내로남불 속에서 푯대는 빛이 바래고, 푯대를 잃은 이성은 무력해진다. 내로남불은 단순한 위선이 아니라,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시켜 준 양심과 이성에 대한 배신이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도전이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법을 흔드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법은 일반의지를 실현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은 의미를 해독하기 쉽지 않지만, 그 기본취지는 명백하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규범의 공통분모를 최대한 구현해야 하고, 모든 구성원들은 법을 따름에 자신의 의지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법을 따르되 법이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법 속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법은 다수결로 결정될 수 없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의 공통적 숙의의 과정을 거칠 때만 이런 법이 마련될 수 있고, 정돈된 사회가 마련된다. 정쟁 상황에서 한 집단이 힘으로 법을 만드는 것은, 루소에 따르면, 질서있는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보루를 훼손하는 것이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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