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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창] 애호가에게 보내는 감사와 경의

중앙일보 2020.10.29 00:21 종합 35면 지면보기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어쩌다 강연을 가서 연사로 소개를 받고 있자면 저절로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생각해 보게 된다. 대개 명지대 석좌교수로 문화재청장을 지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낸 작가임을 덧붙이곤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나는 미술사가 내지 미술평론가이다. 대학에 소속된 학과는 미술사학과이고, 신춘문예를 통해 미술평론가로 등단하였고, 국보순례를 비롯한 저술의 내용은 미술이며, 무엇보다도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이 아니라 미술인이라는 직업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사랑과 안목이 애호가의 본색
작품교환으로 컬렉션의 질 향상
문화 창조는 예술가(생산자) 몫
문화 융성은 소비자(애호가) 몫

미술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화가, 조각가, 디자이너 등 예술가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미술이란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과 관객 사이에 미술관, 화랑, 옥션, 화방과 표구, 미술 저널리즘 등이 작동하면서 미술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 중 미술인이 아니면서 미술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 따로 있으니 다름 아닌 미술애호가이다. 전시회를 찾아와 작품을 감상해 주는 관객이 있어야 미술계는 활기를 띠게 되고 미술작품을 구매하는 애호가가 있어야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그것이 작가의 생활과 창작활동의 지원으로 되고, 결국은 우리 시대 미술문화의 창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미술애호가도 초보에서 고수에 이르기까지 층이 다양하지만 ‘애호가의 생리’라는 것이 있다. 애호가의 첫 단계는 전시장을 찾아가는 관객을 넘어 작품을 한 점 구입하면서 시작된다. 그것은 음악을 좋아하여 음반을 사고 연주회를 찾아가는 것, 문학을 좋아하여 소설과 시집을 사서 읽는 것과 똑같은 문화생활의 영위이다. 그것이 10년, 20년 지나 애장품이 쌓이게 되면 애호가는 수장가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식에서 손창근(오른쪽)·김연순 부부.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식에서 손창근(오른쪽)·김연순 부부.

애호가의 기본은 문자 그대로 사랑이다. 미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돈 내고 미술품을 사지 않는다. 정조시대의 대(大) 수장가인 김광국이 남긴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는 기념비적 회화 컬렉션에 대하여 유한준이라는 문인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진정으로 알게 되면 작품을 모으게 된다”며 사랑으로 시작하여 안목으로 집대성한 위업이라고 했다. 안목이 높아지고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 되면 보다 좋은 고가의 작품을 사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애호가의 생리는 컬렉터의 생리로 바뀐다. 관심 있는 장르에 집중하면서 수장품에 체계를 세우는 단계로 들어간다. 컬렉터들은 이를 ‘구색 맞추기’라고 한다. 취미에 변화가 생겨 유화에서 한국화로, 현대미술에서 고미술로 옮겨가기도 한다. 그런데 미술품은 고가품이기 때문에 아무리 재력가라고 해도 마냥 구입만하여 쌓아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또 공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장가들은 자신이 주력하고자 하는 장르의 구색 맞추기를 위하여 다른 미술품을 팔게 된다. 때론 좋은 작품 하나를 사기 위하여 여러 점을 팔기도 한다.
 
이렇게 컬렉션의 체계를 위하여 작품을 교환하는 것은 수장가의 생리일 뿐 상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때 어떤 작품은 값이 높아지고 어떤 작품은 폭락되어 있기도 한다. 박수근, 김환기, 이우환의 예술이 재평가되어 몇 배 오른 것을 보면서 미술품을 마치 투기의 대상인양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큰 오해다. 값이 그렇게 오를 것을 예측하고 구입한 ‘귀재’는 없다. 좋아서 샀는데 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반대로 당시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청전, 소정 등 한국화6대가의 작품은 20년 전의 구입가도 받기 힘들다. 그러나 진정한 애호가는 언젠가 다시 재평가되는 날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기다린다. 값이 올랐건 내렸건 수장가는 이런 작품 교환을 통하여 컬렉션의 질을 높이며 체계화한다.
 
컬렉터들은 정성들여 모은 수장품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수장품 한 점, 한 점이 다 자식 같다고 한다. 그래서 컬렉션의 이상은 미술관 건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세기에 몇몇을 낳을 뿐이고 대개는 둘 중 하나의 길을 걷는다. 하나는 자손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공립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컬렉터의 자유이지만 자손에게 넘겨주려면 차라리 팔아서 돈으로 주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애정이 없는 유물은 예술품이 아니라 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은 컬렉터의 보람이자 영광으로 남는다.
 
우리나라 자수의 아름다움에 주목하여 열정적으로 수집한 고 허동화 선생의 ‘사전(絲田) 컬렉션’은 내년 봄 안국동 풍문여고 자리에 개관하는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되었고, 손세기·손창근 부자로 이어져온 전설적인 고서화컬렉션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마지막으로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내달 11월에 특별전이 열린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 일인가. 나는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 이 애호가분들에게 깊은 감사와 함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래서 예술사회학에는 다음과 같은 명제가 있다. 한 시대의 미술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생산자)이지만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애호가(소비자)이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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