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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실손보험

중앙일보 2020.10.29 00:08 종합 33면 지면보기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위험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탄생한 인류의 오랜 발명품이 보험이다. 기원전 1750년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엔 ‘해상보험’ 제도가 기록돼있다. 무역하는 사람은 항해에 앞서 자금을 빌리고, 항해 도중 사고로 배가 침몰하거나 짐을 약탈당하면 그 돈을 갚지 않아도 됐다. 대신 무사히 항해를 마치면 원금과 함께 이익금을 돌려줬다.
 
인간의 필요는 새로운 보험을 만들어냈다. 1666년 9월 영국 런던의 빵공장에서 시작된 불길이 4일간 이어지며 런던 시내가 초토화됐다. ‘런던 대화재’ 사건이다. 이후 1681년 세계 최초의 화재보험이 탄생했다.
 
여러 보험 중에서도 실손의료보험은 한국적인 필요를 담은 독특한 상품이다. 병원비 중 국민건강보험 적용 뒤 본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보험사가 보전해준다. 이런 상품은 해외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공공의료체계의 유럽은 실손보험이 애초에 필요 없다. 병원비 걱정이 없으니 말이다. 미국에선 월 몇만원짜리 실손보험이란 불가능하다. 민영화된 의료시스템에서는 보험사가 떠안아야 할 의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첫 실손보험은 1999년 9월 삼성화재가 출시한 ‘삼성의료보장보험’이었다. 건강보험 본인부담률이 높던 시절이다. 전체 병원비 중 환자가 내는 금액이 절반 가까이 됐다. 비싼 자기공명장치(MRI) 진단비나 초음파·레이저치료비는 건강보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월 2만~3만원 보험료로 보장해준다니, 인기 끄는 것이 당연했다.
 
실손보험 등장 초기엔 ‘음모론’이 판쳤다. 실손보험 확대가 의료민영화로 가기 위한 수순이란 주장이었다. 민영 실손보험에 너도나도 가입하면 이를 빌미로 정부가 공적 건강보험을 점차 축소해갈 거라고 우려했다.
 
실손보험이 가입자 3800만명의 ‘국민보험’이 된 지금 보니 결과는 그와 딴판이다. 실손보험 때문에 문을 닫게 생긴 건 공공의료가 아닌 보험회사다. 의료기관의 과잉진료와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로 치솟은 실손보험 손해율이 사회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금융당국은 2017년 실손보험 구조를 대대적으로 바꿨지만, 나아진 것이 없어 내년에 또 손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21년 된 실손보험은 얼마나 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수천 년 보험의 역사 속에서 이 실험적 상품의 결말이 궁금하다.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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