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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총수 세대교체…합종연횡·이종혈투 시대로

중앙일보 2020.10.28 00:04 경제 3면 지면보기
1998년 4대 그룹 총수

1998년 4대 그룹 총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로 그간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이끌던 재계 총수 1·2세대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한국 산업을 이끄는 대기업그룹의 총수 세대교체가 한층 가속화하는 분위기다.
 

젊어진 총수들, 달라진 경영스타일
선대 ‘엄근진’ 모드 대신 친숙·소통
2인자 안 두고 집단지도체제 선호

서로 영역 지켜주기 깨진지 오래
신수종 산업 찾는 전쟁 더 치열

이재용(52) 삼성전자 부회장은 일찌감치 삼성전자를 이끌어왔다.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최근 정의선(50) 회장 체제를 완성했다. 지난해 말 구광모(42) ㈜LG 대표 체제로 전환한 LG그룹도 마찬가지다. 한화그룹 역시 김승연(68)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37) 부사장을 최근 주력인 한화솔루션의 사장으로 승진시키며 그룹 체제를 전환시키고 있다.
 
2020년 4대 그룹 총수

2020년 4대 그룹 총수

젊어진 총수들은 과거 ‘회장님’의 ‘엄근진(엄숙·근엄·진지)’ 모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평을 받는다. 재계 총수 1·2세대는 대부분 평사원과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반면 젊은 총수들은 일반 직원과 직장생활을 함께하며 커리어를 쌓아왔다. 직원들과 수시로 어울리는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이나 그룹 계열사인 SK바이오팜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장녀 최윤정(31) 씨도 그렇다. 정몽준(69) 아산나눔재단명예이사장의 장녀인 정남이(37)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는 스타트업을 육성하며 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들은 사고방식에서 공통점이 많다. 미국 MBA(경영학 석사)를 비롯한 해외 유학 경험은 기본이다. 비슷한 연배의 재벌가 자제들과 어울리며 형성된 네트워크가 겹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에선 선대 회장보다 젊은 총수들이 깊숙한 대인관계에서 보다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는 “재계의 젊은 리더들은 소탈한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어려서부터 소위 ‘리더의 조건’을 몸에 익히며 자라온 사람들”이라며 “유년기부터 고르고 고른 인맥을 쌓아와 선대보다 더 인간관계에 있어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경영 스타일도 달라졌다. 현재의 젊은 대기업 총수들은 대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특정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경우도 드물다. 일부에선 젊은 오너 대부분이 승계 과정 등에서 창업 1·2세대와 함께 그룹을 일군 ‘힘 있는 2인자’로 인해 어려움을 경험했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대신 이들은 SK그룹의 SK수펙스추구협의회 같은 집단 지도체제를 선호한다. 여기엔 구조적 측면도 있다. 한국 재벌들이 글로벌화하면서 총수 개인이 모든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최준선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선대부터 내려온 카리스마 강한 창업 공신은 아무래도 젊은 총수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총수가 모든 걸 챙길 수 없는 만큼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해 그룹을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2020년 대한민국 재계 순위

2020년 대한민국 재계 순위

재계 3~4세 총수 중엔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라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배구조 규제와 상속세 부담이 이들을 압박한다. 때문에 현재 대기업을 이끄는 대부분의 3~4세 총수가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받는 마지막 세대가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5월 대국민 사과문에서 “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음 세대에 경영권을 물려주고 싶어도 현실은 간단치 않다. 일례로 신동빈(65)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34) 씨는 보유 중인 롯데 지분이 거의 없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과거처럼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한 경영권 승계가 어려워졌지만, 차등 의결권 등을 통해 승계 구도를 마련할 가능성이 크다”며 “국민의 신뢰를 받는 대기업이 되고자 한다면, 확실하게 경영 능력을 검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승계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룹별로 주력 사업 분야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유·오프라인 유통·조선·자동차 등 기존 산업은 모두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있다. 각 그룹별로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보고 신수종 산업발굴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 대기업간 영역 다툼은 더 치열해질 것이란 전망이다. 기존 사업 영역 내에선 원하는 만큼의 수익을 내기 어려워서다. 서로의 사업 영역은 넘보지 않는 ‘동업자 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사자와 호랑이’가 같은 링에서 싸우는 일이 더 빈번해질 것이란 얘기다. 이미 현실이 된 분야도 있다. 자동차용 배터리를 놓고 혈투를 벌이는 SK그룹과 LG그룹의 다툼이 대표적이다. 반면 재벌간 제휴와 협력 등 합종연횡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현대차가 전기차 배터리 확보를 위해 삼성·LG·SK와 모두 협력 관계 구축에 나선 것이 그런 사례다. 최근 SK그룹의 인텔 낸드 플래시 사업부문 10조원대 인수 사례 처럼 국내외 대규모 인수·합병(M&A)도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창업세대가 아니면서 미국식 MBA 교육을 받은 상당수 3·4세 총수들은 M&A를 통한 영토 확장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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