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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사냥터'된 랜덤채팅, 판사는 디지털네이티브 주목했다

중앙일보 2020.10.27 13:19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알린 여성 활동가들이 지난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사법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알린 여성 활동가들이 지난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사법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성범죄에 솜방망이 처벌을 해왔다며 법원을 비판하던 여성 활동가들이 극찬하는 판결문이 있다. 지난달 현직 판사로는 홀로 대법원장 표창을 받았던 박주영(52) 울산지법 부장판사가 지난 8일 청소년 성매매 일당을 엄벌에 처한 판결문이다. 
 
박 부장판사는 랜덤채팅앱을 통해 10대 가출 청소년(14~17세)을 유인한 뒤 감금해 250여차례 성매매를 시킨 12명의 남성 피고인에게 징역 18~16년 등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활동가들은 높은 형량보다 그의 판결문에 담긴 '디지털네이티브'라는 신조어와 성범죄 관련 논문에 더 주목했다. 박 부장판사의 판결문을 본 현직 판사들도 "쉽게 보기 어려운 판결문"이라며 다양한 평가를 내놨다.
 
지난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왼쪽)에게 표창을 받던 박주영 부장판사의 모습. [뉴스1]

지난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왼쪽)에게 표창을 받던 박주영 부장판사의 모습. [뉴스1]

랜덤채팅앱에서 청소년 사냥한 범죄자들

박 부장판사가 중형을 선고한 피고인들은 돈이 궁한 가출 청소년들이 랜덤채팅앱을 통해 조건만남으로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고 '조건 사냥'이란 표현까지 사용하며 여성 청소년이란 '사냥감'을 찾아 다녔다.  한 피고인이 채팅앱으로 만난 청소년과 성관계를 가지면 다른 일당이 들이닥쳐 협박을 한 뒤 피해자를 감금하고 성매매를 시키는 구조였다. 
 
박 부장판사는 이를 "성매매에 노출된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이뤄진 성착취 범죄"라 정의했다. 이어 "디지털네이티브로 지칭되는 10대들의 생각과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얼핏 자발적으로 보이는 성매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SNS 등 디지털에 밀착해 살아가는 세대들의 특성을 이해해야, 이들을 겨냥한 성착취 범죄의 본질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사건의 가해자 역시 갓 성인이 된 2000년생과 2001년생 디지털네이티브가 대부분이었다.
 
전국 법원의 성범죄 판결을 모니터링하는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D'씨가 박주영 부장판사의 판결문에 대해 남긴 트윗. [트위터 캡처]

전국 법원의 성범죄 판결을 모니터링하는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D'씨가 박주영 부장판사의 판결문에 대해 남긴 트윗. [트위터 캡처]

디지털이주민과 디지털네이티브  

이 디지털네이티브는 소라넷 폐쇄 운동을 벌였던 반성폭력 활동가 백가을씨가 자신의 논문을 통해 강조한 용어이기도 하다. 백씨는 법정의 판사들을 '디지털 이주민'으로, 현 성착취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 세대를 '디지털 네이티브'로 구분했다. 이어 SNS으로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며 개인 정보가 공개돼있어 성범죄의 문턱이 낮아진 디지털네이티브 세대에 대한 법원의 이해를 촉구했다. 
 
박 부장판사는 양형이유에서도 "디지털로 소통하고 타인의 시선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며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자신의 평판을 두려워하는 청소년을 위협해 성매매에 나서게 하는 범죄의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디지털네이티브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어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않을 짓이지만 남의 딸은 상관없다"며 "랜덤채팅방에서 오고가는 그 낯뜨겁고 노골적인 표현들과 우리 사회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는 아무리 많은 사건을 처리해도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답답함을 드러냈다.
 
랜덤채팅 앱에서의 실제 대화.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랜덤채팅 앱에서의 실제 대화.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판사들도 갑론을박  

이런 박 부장판사의 판결문에 전·현직 판사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법원의 희망"이라 말한 판사도, "성폭력과 성매매 모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범죄란 점을 잘 짚었다"는 판사도 있었다. 
 
하지만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이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신상 정보 공개와 고지를 면제한 점은 아쉽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오히려 이들의 신상을 더 적극적으로 공개, 고지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엄벌이란 결론엔 찬성하지만 판결이 장황하고 특정 성향의 연구자들 논문만 인용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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