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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신뢰 잃은 외교의 끝 ‘왕따 한국’

중앙일보 2020.10.27 00:29 종합 34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한국은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편에 서야 하나. 이와 관련, 올봄 미국에서는 『아시아의 새 지정학(Asia’s New Geopolitics)』이란 눈길을 끄는 책이 나왔다. 아시아 전문가인 저자 마이클 오슬린은 2025년 미·중 전쟁이란 가정 아래 상상의 나래를 폈다. 흥미로운 건 전쟁 후 일본·호주는 미국 편에 남지만 한국은 한·미 동맹을 깬 뒤 친중 블록에 붙는다고 예측한 대목이다. 그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어쩔 수 없이 한국은 중국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상상의 세계인지라 물론 틀릴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갈수록 많은 미 전문가가 이렇게 보는지 숙고해야 한다.
 

어설픈 ‘전략적 모호성’ 고립 자초
친중으로 돌 거라는 예측 늘어나
이전 정권서 맺은 약속도 존중해야

다음 달 3일 미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이기면 세상이 변한다. 하지만 지금의 미·중 갈등은 더할 거다. 어느 정권보다 중국에 적대적인 트럼프 행정부는 시진핑 정권이 무역·안보를 넘어 이념 공세까지 본격화한다고 분개한다. 중국이 자신의 통치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틱톡에 올라온 반(反)중국 글을 삭제하고 수십만 건의 친중 콘텐트를 트위터에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유엔 산하 15개 전문기구 중 4개의 수장을 중국인이 차지해 노골적인 친중 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터에 바이든이 이기면 동맹 강화에 중국 내 인권까지 문제삼을 태세다. 미 대선에서 누가 되든 “자기 쪽에 서라”는 한국을 향한 미·중의 압박이 심해질 게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에 이어 이번 정권도 ‘전략적 모호성’이란 미명 아래 미·중 간 줄타기를 해왔다. 어느 편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다 좋게 지내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보라. 미·중과의 관계가 어떤지. 며칠 전에는 3년 전 겨우 봉합한 사드 갈등이 폭발했다. 2017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밝힌 3불 원칙을 두고 “중국과 합의된 게 아니다”고 지난 21일 남관표 주일대사가 부인하면서 사달이 났다. 그러자 중국 외교부가 나서 “합의를 달성했다”고 공식 반박했다. 물밑에 잠겼던 사드 갈등이 다시 불붙으면 한·중 관계는 얼마나 나빠질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지난 15일 열린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는 얼마나 충돌이 많았던지 국방장관 기자회견이 취소됐다. 현 정권 인사들은 한·미 동맹을 흔드는 말을 쏟아내고 이를 미국이 반박하는 해괴한 일들이 꼬리를 문다. 미·중뿐이 아니다. 일제 강제동원 판결에 따른 현금화가 실현되면 일본의 거센 보복이 시작될 게 분명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이는 현 정부가 미·중·일 모두에 ‘신뢰’를 잃은 탓이다. 대북 문제 올인에다 국내정치용 대응으로 일관하니 긴 안목의 안정된 외교가 가능할 리 없다. 3불 원칙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지만, 이미 강 장관이 밝힌 내용이라면 남 대사가 거듭 부인해 중국을 자극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미국에는 북·미 관계를 중재하려는 욕심에 희망적 견해만 전해 믿음을 잃었다. 일본의 경우 전 정권이 맺은 위안부 합의를 2년 만에 뒤집었으니 신뢰가 생길 리 없다.
 
국제무대에선 정치와 경제의 구별이 없다. 외교가 틀어지면 보복관세, 첨단 품목 수출규제, 한한령 등 무역으로 보복하기 일쑤다. 외교를 잘못하면 국민경제가 멍든다는 얘기다. 전략적 모호로 모두에 불신을 산다면 한쪽 편을 드는 것만도 못하다. 친미든, 친중이든 한편은 건질 게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초반, 무수히 다퉜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마음을 산 건 믿음 덕분이었다. 부시에게 이라크에 파병하겠다고 한 노 대통령은 국내 반발을 무릅쓰고 약속을 지켰다. 이에 감동한 부시는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인 북한 자금 2500만 달러를 풀어줘 막혔던 대북 관계의 물꼬를 터준다.
 
전략적 모호 정책으로 미·중 모두와의 관계를 좋게 하려면 신뢰를 쌓는 게 최우선이다. 그러려면 외교적 합의, 심지어 이전 정권에서 맺은 구두 약속일망정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꿔선 안 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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