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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안정세라니까요!

중앙일보 2020.10.26 00:42 종합 35면 지면보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조선은 인민의 머리를 지배했던 지식국가였다. 500년 통치에 인민봉기나 민란이 없는 나라는 드물지만 조선은 예외였다. 19세기 후반, 드디어 민란이 발생했다. 1862년, 나무꾼 집단인 초군과 빈농이 주도한 진주민란에 신흥부자와 몰락양반이 합세했다. 관아와 사족들의 집이 불탔다. 조정은 사간원 정언을 지낸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했다. 직언으로 명망이 높은 그가 사태를 왜곡할 리 없었다.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렸다.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보면, 탐학관원과 사족들이 결탁해서 과도한 세금을 부당 징수한 까닭입니다. 묘당이 품처하게 해주소서.”
 

촛불광장에서 탄생한 정권의 독주
흠결 제로 결벽증은 정권 중 으뜸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이 최후 보루
정권의 무적 행진, 사란은 작란될 것

부랑자와 무뢰지배의 난동이어야 했다. 그러니 고관의 가렴주구와 부세 모순을 지목한 박규수의 간언을 조정이 순순히 받을 리 없었다.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조정은 앓아누운 철종의 승계에만 열을 올렸다. 박규수는 파직됐다. 민란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1860년대에 삼남지역에만 70여 군데, 1876년에서 1893년까지 북부지방에서 50여 차례 민란이 발생했다. 패휼(悖譎)을 일삼는 무리는 다름 아닌 조정이었다. 사란(思亂)이 싹텄고, 사란은 창란(創亂)으로 급기야 작변(作變)이 됐다. 패휼, 도리에 어긋나며 남을 기망하는 일. 망국의 작태가 민주화 33년된 나라의 현실과 겹치는 요즘이다.
 
세상의 도(道)에 어긋나며 국민을 기망하는 일, 김현미 국토부장관의 말을 듣다보면 ‘패휼’이 떠오른다. 집값은 안정된다는데, 진정 안정세인가? 도봉구와 노원구에도 전용면적 84㎡에 10억원을 호가하는 아파트가 나왔다. 강남 잔혹사는 서울 전역으로 퍼졌고, 지방 도시에도 아파트 값이 치솟는다. 불과 5년 전만해도 10억원 아파트는 부자의 징표였다. 내 집이 10억원을 돌파해도 반갑지 않다. 종부세와 재산세만 더 물게 생겼다. 서민층과 젊은 세대에게 아파트 단지는 진입이 차단된 성(城)이다. 전세물량도 씨가 말랐다.
 
‘안정세에 들어섰어요!’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국토부장관과 길에 나앉을 판인 홍남기 부총리의 천연덕스런 답변에 억장이 무너진다. 촛불광장에서 시민주권을 외치던 대통령의 존재감은 사라졌다. 실상을 알고는 있는지를 되묻는 것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현정권이 천문학적 재정을 쏟아 부은 정책들이 하나같이 서민생계에 치명적인 부실공사였음이 드러나도 묵묵부답이다. 소득주도성장은 자영업과 영세업자를 결단내고 끝났다. 책임자는 흩어졌다. 기회평등과 과정의 공정을 실현한다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정규직 진입의 문이 닫힌 지 오래다. 코로나 충격으로 정규직 대상자들의 비정규직화가 한창 진행 중이다. 도대체 노동시장 개념은 있는가? 누구의 손에 기안되어 어떻게 국책으로 옮겨지는가?
 
숲을 파헤치고 벼랑에 위태롭게 늘어선 태양광발전 시설들은 태풍에 뒤집혔다. 토사가 흘러내려 민가를 덮쳐도 탈원전 시책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태양광에 올인했던 대만은 이제 호수에 설치된 발전기판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물이 썩고 생태계 파괴가 심각해진 탓이다. 태양광산업에 정권 배후세력이 들러붙었음은 다 아는 사실, 산자부는 탈원전 공약의 전초부대였다. 예전 같으면 암행감찰은 사헌부 소관, 요즘 감사원에 해당한다. 감사원장은 월성 1호기 폐쇄 감찰결과를 보고했다. 재정 손실 수천억 원, 산자부 직원들이 컴퓨터 저장 문서를 통째로 지웠다는 사실이 적시됐지만 조정과 세도배(勢道背)들의 활약으로 묻혔다. 탈원전 공약은 어떤 비용을 치러도 완수돼야할 천명(天命)이다. 감사원장은 ‘패휼’ 공세를 견디고 있다.
 
형조판서와 의금부제조(提調) 간의 드잡이는 볼썽사납다. 예전에 의금부제조는 어명은 물론 형조와 사헌부의 지시를 따라야 했지만,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지켜야 하는 것이 국민국가 검찰총장의 헌법적 책무다. 유재수 수뢰 연루자, 울산시장 선거 불법행위는 풍설로 남았다. 정권비리 수사로 청와대 압수수색을 감행한 검찰총장은 위험천만한 수괴(首魁)다. 감히 어딜! 불경죄에 대역죄가 추가됐다. 추장관 아들 문제 난투극은 검찰개혁을 저지하려는 불온한 세력의 패휼로 규정됐다.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이 국민의 인내심을 그나마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다. 숱한 정권을 겪어봤지만, 현정권의 ‘흠결 제로’ 결벽증은 단연 으뜸이다. 집권 여당 이백 명 정치인의 소신이 그렇게 한결같을까. 부작용이 명약관화한 사안도 하루 밤사이 밀어붙이는 담합의 댐에 국운은 익사 직전이다. 검찰총장을 결박하면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극 라임·옵티머스 사태도 풍설로 남을 것이다. 장관의 오기와 총장의 결기, 대체 개혁대상은 누구인가? 명백한 물증을 들이대도 꿈쩍 않는 고관대작들의 이상(異常) 언행에 국민들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젠 헛웃음이 나지만 어쩌랴, 안정세라는데. 세상은 안정세다. 자꾸 성가시게 되묻지 말라. 장안에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생겼다. 정권의 항해는 무적함대다. 권력도 경제도 안정이다. 다 잘 될 겁니다, 안정세라니까요! 사란이 작란(作亂)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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