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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봤습니다] 비행기는 탔지만 목적지는 없다…완판된 9만9000원 여행

중앙일보 2020.10.26 00:03 경제 5면 지면보기
지난 23일 제주항공 기내에서 승객들이 탑승권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공항사진기자단]

지난 23일 제주항공 기내에서 승객들이 탑승권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공항사진기자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외할머니가 계신 예천(경북)에 못 가는데 비행기가 예천 하늘을 지난다고 해서 비행기를 탔어요.”(초등학교 5학년 윤하은양)
 

제주항공, 국내 첫 이벤트 비행
인천공항 출발해 인천으로 도착
1시간 반 동안 특별한 하늘 여행

“결혼한 지 38년, (제가) 속 많이 썩였던 아내 생일을 맞아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어 하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익명을 원한 승객)
 
지난 2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제주항공 항공기 안. 탑승객이 엽서에 적은 사연을 승무원이 기내방송으로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제주항공이 국내 항공사 가운데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기획한 ‘목적지 없는 비행’의 프로그램 중 일부다.
 
이날 오후 4시 3분 인천공항을 떠난 항공기(B737-800)에선 승객 121명이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며 손뼉을 치고 함께 웃었다. 1시간 30분가량의 비행시간 동안 기내는 떠들썩했다. 승무원의 마술쇼·퀴즈·게임과 함께 행운의 추첨 이벤트 등이 이어졌다. 강민승 장안대 항공관광과 교수는 학생 34명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강 교수는 “항공사 취업을 원하는 학생들”이라며 “비행 체험을 하면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특징은 목적지가 없다는 점이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군산·광주·여수·예천·부산·포항 등 국내 주요 도시의 하늘 위를 난 뒤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요금은 일반석이 9만9000원, 비즈니스석(12석)은 12만9000원이었다. 코로나19로 사실상 중단된 해외여행에 갈증을 느끼는 소비자가 몰리며 ‘완판(완전 판매)’됐다.
 
승객들이 각종 사연을 적은 엽서의 모습. [사진 제주항공]

승객들이 각종 사연을 적은 엽서의 모습. [사진 제주항공]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기 위해 3인용 좌석에는 두 명만 앉았다. 제주항공은 실제 가용 좌석(174석)보다 적은 121석만 운영했다.
 
기내에서 만난 제주항공 오성미(34) 사무장은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혀 휴직에 들어갔다가 7개월 만에 비행에 나선다”며 “특별한 하늘 여행을 시작한 만큼 항공업계가 되살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은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비행에 앞서 승객 121명은 탑승권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아시아나항공도 24일과 25일 목적지 없는 비행 상품을 선보였다. 아시아나 항공기(A380)를 타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강릉·포항·김해·제주 상공을 비행한 뒤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지난달 상품 판매를 시작한 당일로 매진됐다.
 
항공업계는 코로나19로 이용객이 급감한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세계 항공업계는 목적지 없는 비행 상품을 속속 도입하는 추세다. 항공기의 운항 횟수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시스템 정비 등을 진행할 수 있어서다. 항공사 소속 조종사의 비행 라이선스(면허)를 유지할 필요도 있다. 여객기의 경우 기종마다 조종 면허가 다르다. 조종사가 일정 수준 이상 비행시간을 유지하지 못하면 면허를 잃을 수 있다.
 
김재천 제주항공 부사장은 “목적지 없는 비행 상품은 코로나19 시대에 항공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자는 취지”라며 “여행 자체가 목적인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는 비행기라는 공간이 결혼식·동창회 같은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인천=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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