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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왕은 잔 다르크를 구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2020.10.22 00:35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1430년 5월, 프랑스 파리 근교 콩피에뉴에서 잔 다르크가 전투 중 낙마하면서 영국과 손잡은 부르고뉴파에 붙잡혔다. 부르고뉴파의 리니 백작은 당시 포로 처리 관례대로 잔의 주군인 샤를 7세에게 석방을 조건으로 몸값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은 답하지 않았다. 몇 달을 기다리던 리니 백작은 1만 리브르 트르누아(지금으로 치면 금 67㎏ 정도라고 한다)를 받고 잔을 영국에 넘겨버렸다. 잔 덕택에 대관식을 치렀던 샤를 7세다. 그런 그가 고개를 돌린 이유는 잔의 지나친 전투 의지 때문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휴전을 원했던 왕이 부담을 느낀 것이다. 토사구팽, 조진궁장(鳥盡弓藏·새를 잡은 활은 창고에 들어간다)의 정치 생리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권력 지키기 무리수 두는 추미애
악역 맡긴 채 친문 권력은 지원전
쌓여 가는 비호감은 어떡할 건가

“이렇게 강단 있는 법무부 장관을 본 적이 없다.” 추미애 장관을 칭송하는 친문 의원의 이 말에서 사냥개의 목줄을 푸는 사냥꾼의 독려가 느껴진다. 청와대도 “수사 지휘는 불가피했다”는 입장을 냈다. ‘성역 없는 수사’ 운운했지만, 윤석열 검찰총장을 찍어내라는 노골적인 지시다. 천문학적 펀드 사건을 놓고 검찰이 여권만 캐고 있다는 의구심은 이해한다 치자. 총장의 가족 수사를 적시한 수사지휘권이 펀드 수사와 무슨 관련이 있나. 총장 임명 청문회에서 “가족 사건은 아무 문제없다”고 보증한 여당 의원은 어떻게 말을 바꿀 건가.
 
정부 수립 이후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딱 세 번이다. 이 중 두 번이 추 장관의 작품이고, 둘 다 공교롭게 사기 혐의자의 주장에서 시작됐다. 더구나 ‘검언유착’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행사한 첫 번째 수사지휘권의 결과는 ‘태산명동 서일필’이 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 강정구 교수 구속을 놓고 천정배 장관이 행사한 첫 번째 지휘권은 그래도 명분이 있었다. 탈냉전 시대 새로운 인권 보호와 검찰 독립성 논리가 충돌했다. 검찰을 권력에 복속시키겠다는 의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도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며 추 장관을 거들었다. ‘민주’라는 말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선출 권력이 검찰을 통제한 예로 거론되는 사건이 있다. 2015년 독일 하이코 마스 법무부 장관이 하랄트 랑게 검찰총장을 해임했다. 랑게 총장은 한 인터넷 매체를 반역죄 혐의로 수사하려 했다. 국가 기관의 정보 감시 강화 계획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국가 기밀문서를 빼돌렸다는 이유에서다. 장관은 언론 자유 침해 우려를 이유로 수사 중단을 지시했으나 총장이 반발하자 인사권을 꺼냈다. ‘민주적 통제’라는 말을 붙이려면 지키려는 가치가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가 비선출 권력 기구를 사유물처럼 주물러도 된다는 마패는 아니지 않은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쓰는 막장 드라마의 총연출자는 따로 있겠지만, 악역을 맡은 배우인들 계산이 없을 리 없다. 추 장관에겐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찬성으로 나락에 떨어졌던 트라우마가 있다. 그의 ‘오버 액션’은 나름의 생존법일 것이다. 당의 폐쇄성에 질려 떠나는 금태섭 전 의원을 향해 ‘배신자’ 딱지를 붙이는 여권 분위기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흐물흐물 60%보다 강철대오 40%가 힘이 세다는 정치적 셈법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영국인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라는 희곡에서 잔 다르크(극 중에서는 잔 라 퓌셀)를 마녀·악녀·요부로 묘사했다. 추다르크라는 별명에도 양면성이 있다. 아집·분노장애·미성숙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소신·강단·치열함을 읽는 사람도 있다. 진영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 평가를 받아서야 잔 다르크에 빗댄 별명이 아깝지 않은가. 권력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던 판결, 세간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택했던 사랑, 망국적인 지역감정에 맞섰던 정치행보 등은 정치인 추미애로선 소중한 자산이다. 그 위에 점점 비호감의 먼지가 쌓이고 있다. 토사구팽의 위험을 본인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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