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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문화난장] 예술과 철학 배우는 ‘홈리스 예수’

중앙일보 2020.10.22 00:21 종합 26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중앙일보가 서울 서소문에서 상암동으로 옮겨왔다. 서소문 시절, 사옥 건너편 서울역 쪽에 있는 서소문역사공원에 종종 들렀다. 숱한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천주교의 슬픈 역사가 서린 장소다. 이곳 한구석 벤치에 예수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얇은 담요로 온몸을 두르고 얼굴과 발만 겨우 드러낸 채 벤치에 누워 있는 형상이다.
 

국내 첫 노숙인 문집 뭉클
1년 공부하며 자존감 찾아
삶의 가치 깨닫는 시편들
“인문학은 더불어 사는 것”

작품명은 ‘노숙자 예수’(Homeless Jesus). ‘노숙자 예수’는 제법 유명하다.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가 세계 100여 도시에 설치해 놓았다. 마태복음 25장 34~40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노숙자 예수’를 책으로 다시 만났다. 신간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에서다. 제목만 보면 서정성 짙은 시화집 같은데 내용은 그 대척점에 서 있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노숙인들이 직접 쓴 시와 산문 167편이 실렸다. 무엇 하나 허투루 읽을 수 없을 만큼 사연 사연이 곡진하다. 국내 최초 노숙인 문집이란 설명이 번거로울 정도다.
 
서울 서소문역사공원에 있는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의 ‘노숙자 예수’. 벤치에 누워 있는 예수의 발끝 옆에 사람들이 잠시 앉을 자리를 남겨 두었다. [중앙포토]

서울 서소문역사공원에 있는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의 ‘노숙자 예수’. 벤치에 누워 있는 예수의 발끝 옆에 사람들이 잠시 앉을 자리를 남겨 두었다. [중앙포토]

노숙인이란 단어에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동정적 시선도 온당하지 않다. 고단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출신·환경이 각기 다르고, 거리로 내몰린 연유도 제각각이지만 불우한 어제를 이겨내고 새로운 오늘을 준비하려는 다짐만큼은 하나같다.
 
물론 이들의 현실은 고달프기만 하다. ‘장대비 속에 긴 배식줄/빗물바아압 빗물구우욱 비잇무울 기이임치이.(중략) 오로지 먹는 것 쑤셔 넣는 것. 빗물 반 음식 반 그냥 부어 넣는 것이다.’(권일혁 ‘빗물 그 바아압’) ‘밥 한 술 해결을 위해 찬송가와 거래를 하는’(유창만 ‘밥 한 술’) 일상이다.
 
일자리가 변변할 리도 없다. 서울역 생활 25년, 고물을 수집하는 노기행씨의 ‘이놈의 세상’을 보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지만 그리 할 만한 일이 많지는 않다.(중략) 내 일이 없으면 내일이 없다. 추신:헌옷이나 잡다한 물건은 나를 주시오.’ 각박한 삶에서 걷어 올린 유머가 반짝인다. 폐지 실은 리어카를 끌고 서울역에서 출발해 조치원·청주·대전을 거쳐 해운대까지 왕복한 박진홍씨도 있다. 바다가 그에게 물었다. “너 왜 왔냐?” 그가 대답했다. “고물일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가지고.”
 
이 책의 고갱이는 투명인간·잉여인간으로 살아가던 노숙인들이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이다. 특히 거울 관련 대목이 인상적이다. 자신의 벗은 모습을 볼 수 없어 거울을 주먹으로 내리쳤던 고(故) 고성원씨는 “난 요즘 거울을 보기 시작했다. 기지개를 켜듯 조금씩 조금씩 자아에 대해 알게 됐다”고 했다. 서○미씨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지난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리가 다짐해본다”고 썼다. 자신을 직시할 용기를 찾은 것이다.
 
노숙인들이 공부하는 성프란시스 대학 졸업식 모습. [사진 삼인]

노숙인들이 공부하는 성프란시스 대학 졸업식 모습. [사진 삼인]

이들의 자활 의지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다. 2005년 9월 성공회에서 개설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을 거쳤다. 문학·역사·철학·예술사·글쓰기 다섯 과목을 일주일에 3일, 1년 30회 수업을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대학인 셈이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로 16기생을 맞았다. 이번 문집은 개교 15년을 기념해 출간됐다. 인문학이란 고상한 단어를 처음 듣고, 때론 경멸하던 이들이 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며 인간을 이해해가는 모습이 송이송이 담겼다. 삶의 현장을 학교 삼아 공부해온 이들의 육성이 뭉클하다. 인문학의 몰락이란 상아탑의 푸념이 부끄러워질 뿐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본체는 뭘까. “노숙인이 인문학을 한다면 꼴값한다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인문학을 배운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깨닫는다.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고 동료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이○근의 ‘철학을 배운다’)  
 
이만한 대답이 또 어디 있을까.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안아주고,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나름 이해해본 인문학이다.”(김연설의 ‘고상한 삶’). 서로서로 멀어진 코로나19 시대 인문학의 시작과 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소문공원의 ‘노숙자 예수’가 말을 걸어온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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