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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관계의 온도

중앙일보 2020.10.21 00:38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레이저 눈빛’을 쏘아대던 사람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보는 사람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발사해서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얼음공주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타인의 감정에 어떤 공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인정이 없고 냉혹한 사람들을 극단적으로는 냉혈한(冷血漢)이라고 부른다. 오죽하면 차가운 피가 흐른다고 표현할까. 창자마저 차갑다는 의미에서 냉장(冷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짓는 미소는 냉소(冷笑), 그들이 타인을 향해 내뱉는 독설은 냉어(冷語)라고 부른다. 영어권 사람들이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불친절한 사람들을 ‘콜드 피쉬(cold fish)’라고 부르는데, 이 또한 냉어(冷漁)가 아닌가.
 

관계의 깊이는 온도로 표현돼
몸이 따뜻할수록 세상을 신뢰
따뜻한 공간이 힐링의 시작점

주변에 온통 이런 사람들뿐이라면 세상은 온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음 지옥일진대, 다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나 온화(溫化)한 미소를 보내주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삶의 온도는 늘 36.5도다. 그들이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우리를 절벽에서 돌려세웠고, 그들이 건넨 따뜻한 손이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의리의 친구가 곁에 있다면 밤길도 두렵지 않다. 친구 간의 뜨거운 맹세는 우리 마음을 얼마나 든든하게 만들었던가. 노년기의 여유는 젊은 날의 열애(熱愛)의 기억 때문 아니던가. 어머니의 따뜻한 집밥은 영원한 영혼의 음식이 아니던가.
 
이처럼 관계의 언어는 온통 온도로 가득 차 있다. 관계의 언어는 온도의 언어다. 관계라고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소통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효과적인 은유가 온도다. 물론 ‘거리’의 언어를 통해 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가까운 사이라거나 먼 친척이라는 말들로 관계의 깊고 얕음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차갑다’ ‘따뜻하다’ 등의 온도의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 중 하나가 적정한 체온이다. 체온은 우리 몸의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체계다.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가장 먼저 스스로 체온부터 확인한다.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체온을 재는 행위야말로 인류가 체득한 고도의 생존 기술인 셈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타인을 기술할 때 가장 원초적으로, 그리고 가장 빠르게 사용하는 판단 기준이 따뜻함(warmth)이다. 타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도 그 사람의 사진을 잠깐만 보면 그의 온화함 정도를 추측해낼 수 있다. 사람을 평가하는 수많은 기준 중에서 온화함이 으뜸이라는 점은 관계의 언어가 온도의 언어일 수밖에 없음을 지지해준다.  
 
결국, 인간에게는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온도에 따라 구분하는 특기가 생긴 것이다.
 
최근의 뇌 과학 연구는 온도를 경험하는 뇌의 영역과 관계를 경험하는 뇌의 영역이 중복된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인간의 뇌에 있는 대뇌섬(Insula)은 위험과 불확실성에 관여하는 영역인데, 이곳이 몸이 차가울 때도 활성화된다고 한다. 체온이 낮아지면 대뇌섬이 작용하여 주변의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하여 경계하는 모드로 돌입하고, 체온이 높으면 세상과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고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한 불안이 줄어드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몸이 따뜻한 순간에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가 가깝다고 느끼고, 몸이 차가운 순간에는 타인과의 심리적 거리가 먼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 몸이 따뜻해졌을 때 타인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늘어난다는 참신한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마음이 외로우면 괜스레 춥게 느껴지고, 날씨가 추우면 왠지 모르게 외로움이 밀려오는 듯한 우리의 경험이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체온을 관리하는 것이 관계를 관리하는 길이 될 수 있다니 온도에 각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다.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들의 마음을 열고 싶다면 그들을 맞이하는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물 한 잔이 이미 치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언어가 온도의 언어라는 점을 알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부모님에게 따뜻한 보일러를 놔드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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