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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사라져가는 토종 들국화, 40년 넘게 되살리다

중앙일보 2020.10.21 00:32 종합 24면 지면보기

코로나 블루 달래는 국화 향기

‘국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천시 검암동 국야농원 이재경 대표. 우리 산하에 피고 지는 들국화에 매료돼 지난 40여 년을 품종 개량에 힘써왔다.

‘국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천시 검암동 국야농원 이재경 대표. 우리 산하에 피고 지는 들국화에 매료돼 지난 40여 년을 품종 개량에 힘써왔다.

가을의 한복판이다. 코로나19 범유행으로 가을이 가을 같지 않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으로 시작한 2020년이 어느덧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로 들어섰다. 그럼에도 파란 하늘과 노란 들판이 큰 위안을 준다. 가을 하면 역시 국화의 계절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런저런 국화 축제가 취소·축소됐음에도 코끝을 찌르는 국화꽃 향기는 그윽하기만 하다. 짧게나마 코로나 블루(우울증)를 씻어준다.

‘국화의 아버지’ 이재경씨의 집념
형형색색 자생국화 300여종 키워
“전국 산과 바다 안 간 곳 없어요”
신품종만 43종, 화장품도 시판돼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당장 떠오른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고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읊었다. 노천명 시인의 ‘들국화’도 있다. ‘들녘 비탈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중략) 외로운 계절 홀로 지키는 빈들에 색시여’라고 했다.

 
한 송이 들국화를 피우려 43년을 울어온 사람이 있다. 인천시 검암동 산자락의 국야농원 이재경(81) 대표다. 지난주 초 국야농원을 찾아갔다. ‘들국화 세상’ 안내판이 단출하다. 약 3300㎡(1000평) 부지에 형형색색의 들국화가 만개해 있다. 하양·노랑·분홍·보라, 꽃들의 화려한 잔치와 그 꽃들에 앉은 벌과 나비의 경쾌한 날갯짓에 눈이 시원해지고, 귀가 즐거워진다.

  
향기 진하고 약효도 뛰어난 자생국화

 
그가 공식 등록한 신품종 중 일부다. 사진은 국야설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가 공식 등록한 신품종 중 일부다. 사진은 국야설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야(菊野)는 이 대표가 스스로 붙인 호(號)다. 농원에는 들국화 3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대부분 여느 화훼장이나 꽃집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대표가 직접 육성한 신품종들이다. 문외한에겐 서로 비슷해 보이는데 그는 “꽃 색깔과 모양, 크기가 각기 다르다. 잎 모양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라며 살며시 웃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인제는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과 평생을 함께해온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다.

 
이 대표는 민간 육종가다. 정부나 대학, 기업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신품종을 빚어왔다. 그가 지금까지 공식 등록한 들국화 신품종만 43종에 이른다. 국내 최다 기록으로, 각 품종 앞에 그의 호인 국야를 붙인다. 국야백파·국야백해·국야청해·국야설화·국야신선·국야장서 등등. 또 현재 60여 종을 신규 출원 준비하고 있다. 나머지 200여 종은 계속 실험·관찰 중이다. 색과 향, 형태가 우수한 것을 고르고 골라 신품종 하나를 내놓는데 최소 4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가 공식 등록한 신품종 중 일부다. 사진은 국야청해.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가 공식 등록한 신품종 중 일부다. 사진은 국야청해.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화는 사실 품종 이름이 아니다. 통상 그렇게 부를 뿐이다. 국화과에는 국화속(산국·감국·구철초 등), 쑥부쟁이속, 갯쑥부쟁이속, 개미취속(섬쑥부쟁이·해국 등) 등이 있다. 이 대표는 그중에서 우리 땅에 사는, 멸종 위기에 놓인 자생국화(들국화)에 전념하고 있다.

 
“국화는 세계적으로 2만여 종, 국내에는 300여 종이 분포해 있어요.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가 원산지인데, 유럽·미국 등으로 전파되며 수많은 품종이 생겼습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치는 국화는 대부분 외국 원예종입니다. 우리 산하의 들국화를 살려내겠다고 결심했어요. 자생국화는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좋은 것은 물론 각종 약효가 뛰어납니다. 한국인은 국화를 보면 코를 먼저 갖다 내는데, 외국 원예종은 사실 향기가 매우 약합니다.”

 
일례로 구절초를 보자.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양력으로 오는 25일)이 되면 아홉 마디가 된다고 해서 구절초로 불리는 들국화의 대표 선수다. 예부터 부인병 질환에 효과가 있어 옛날 우리 여인네들의 혼수품에 포함됐다. 국화전·국화차·국화주·국화채 등 여러 용도로 쓰였다. 이 대표가 2016년 국내 100번째 산림 식물 신품종으로 등록해 보호권을 인정받은 국야샹월의 경우 흰 꽃이 피는 자생종과 다르게 황색 겹꽃에 독특한 향을 갖고 있다.

 
그가 공식 등록한 신품종 중 일부다. 사진은 국야백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가 공식 등록한 신품종 중 일부다. 사진은 국야백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대표는 멸종 위기의 흰감국도 복원·개량했다. 꽃이 노란 일반 감국과 달리 흰 꽃이 피는 흰감국을 강원도 산골에서 발견하고 이를 개량해 국야설화·국야수율 등의 신품종을 만들었다. 또 이들 국화에서 뽑아낸 추출물이 담긴 화장품을 아모레퍼시픽에서 10년 전에 개발·시판 중이다.

 
이 대표는 원래 보험영업을 했다. 취미로 원예를 하다가 “우리 국화의 뿌리를 찾겠다”며 1977년부터 들국화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향기에, 그다음에 색에 매료됐어요. 백두산부터 금강산·한라산까지 전국의 산과 바다, 섬을 수없이 누볐습니다. 딱히 배울 사람도 없었어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개척한 셈이죠. 하나하나 새로운 걸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기쁨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즐겁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겠죠. 이곳에선 방방곡곡의 들국화를 한 번에 볼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외국 원예종만 볼 건가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 대표는 2002년 정부로부터 신지식 임업인으로 선정됐다. 주변에선 ‘국화 박사’ ‘국화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요즘에는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데 열심이다. 자생국화의 가치를 더 많은 이와 공유하려는 뜻에서다. 강원도 오대산 소금강 계곡에 국화 체험교실을 짓고 있는 임병두소금강영농조합 대표는 “참취·고들빼기·곤드레나물도 들국화에 포함됩니다. 식용·약용으로 두루 쓰인 우리 국화의 상품화 가능성은 무궁하다”고 말했다. 야생화 작가 조영학씨는 “이 대표는 국내 최고의 국화 재배·육종가”라며 “그가 닦아온 길을 후학들이 더욱 넓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들국화의 산업화를 기대했다. “5년 전 중국 약리학자가 개똥쑥에서 찾아낸 항말라리아 성분으로 노벨의학상을 받았습니다. 개똥쑥 붐이 일었죠. 개똥쑥도 들국화입니다. 국화의 기억력 증진, 치매 예방 효과는 진작부터 주목받았어요. 사비를 들여 한림대와 성분 분석도 했습니다. 해마다 식물 종자로 외국에 지불하는 막대한 로열티를 생각해보세요. 제가 불확실한 미래와 싸워왔다면 좀 더 많은 전문가가 앞날을 밝혀주었으면 합니다.”

 
참고로 올해 국감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버섯·장미·국화 등 종자 사용료로 외국에 지불한 로열티는 1357억원에 달했다. 반대로 받은 돈은 26억원에 그쳤다. 갈 길이 멀고 멀다는 뜻이다. “한국인이 즐기는 국화차 원료도 중국산이 많아요. 우리가 우리를 홀대해온 것이죠.” 갑작스레 그룹 들국화의 ‘행진’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의 과거는 어둡고 힘들었지만 앞으론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우리 들국화도 긴긴 세월을 그렇게 버텨왔을 것이다.
 
백두와 한라의 구절초가 만난다면…
국야한암

국야한암

“마지막 남은 꿈은 통일구절초입니다.”

 
이재경 대표의 소망은 남북이 하나로 만나는 국화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른바 ‘통일구절초’다. 백두산 바위구절초와 한라구절초를 교배한 국화다. 지난 5년 동안 부단히 실험해왔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난제는 두 꽃의 개화 시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백두산 바위구절초는 봄에, 한라구절초는 가을에 꽃이 피기에 두 꽃의 교배가 여의치가 않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백두산 바위구절초 꽃가루를 미리 받아 냉장 보관한 다음 한라구절초와 수정시키거나, 아니면 온실에서 개화 시기를 인공 조절해 두 꽃이 피는 시간을 맞추면 된다. 인공 개화의 경우 난방시설을 갖춘 온실이 필요하지만 이 대표는 “겨울에는 사람도 꽃도 쉬어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 대표는 통일구절초에 앞서 2년 전 설악산 바위구절초와 한라구절초를 교배한 ‘국야한암’(사진)을 내놓았다. 둘의 개화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통일구절초의 전초병인 셈이다,

 
“구절초는 일반적으로 키가 큰 반면 국야한암은 지피식물처럼 땅에 붙습니다. 한라구절초가 키가 작은 편이거든요. 통일구절초도 꼭 만들어 낼 겁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죠. 우리가 염원하는 통일도 그렇게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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