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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홍석현 이사장 "한중일 정상회의, 한일 개선 중대한 전기"

중앙일보 2020.10.20 05:55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21세기의 건전하고 안정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한 청사진
 
 
안녕하십니까. 미로에 갇힌 한일관계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써오신 여러분들과 오늘 뜻깊은 자리를 갖게 돼서 감개무량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서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이홍구 전 총리와 고지 일본 대사,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 김윤 한일경제협회 회장을 포함한 내외 귀빈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친선협회중앙회 회장, 사사키 미키오 일한경제협회 회장, 스기타  료키 전 니혼게이자이 신문 회장,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 나리카와 아야 아사히신문 전 기자, 아사바 유미 도시사대 교수와 젊은 대학생들이 보내주신 따뜻한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는 저희 한일비전 포럼 멤버 모두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됐습니다.  
 
 
이 모임을 기억하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신 박병석 국회의장, 정세균 국무총리,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께도 한일비전 포럼 멤버들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양국의 지도자와 지성, 양심이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면 어떤 난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특히 “패전국은 피해를 입힌 분들에 대해서 그들이 더 이상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까지 사죄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무한책임론을 언급한 하토야마 전 총리의 말씀에 무한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청년기에 스탠퍼드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일본의 대표적 지성인에게 경의를 보냅니다.  
 
 
여러분, 제레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는 저서 ‘총‧균‧쇠’에서 한일 양국을 “같은 피를 나누었고, 성장기를 함께 보낸 일란성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양국은 2500년동안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각자의 문명수준을 향상시켰고, 특히 1965년 이후에는 역사상 최고의 상호이익을 실현했습니다. 양국은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의 지배, 인권 존중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단 둘 뿐인 OECD국가입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고, 한때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었고, 지금도 3조 달러의 순자산을 가진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가입니다. 한국은 전후 유일하게 개도국에서 민주화와 산업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입니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현대자동차를 동시에 가졌고 BTS를 탄생시킨 역동적인 나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은 외교‧과거사‧경제‧안보의 모든 영역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혼돈의 전환기라 양국에 어느 때보다도 상호협력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호의존성의 무기화(weaponization of interdependency)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문명국가의 수치입니다. 시대착오적 과잉민족주의의 망령을 경계해야 합니다. 단 하나의 갈등 요인이라도 추가되면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 될 수 있습니다.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합니다.  
 
 
다행히 스가 요시히데 신임 일본 총리는 실용적 현실주의자입니다. 한일관계 개선의 의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내에서도 악화된 한일관계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기 계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지혜와 헌신 덕분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한일협정 60주년인 2025년을 목표로 지금부터 역사화해 프로세스에 돌입할 것을 제안합니다. 제국과 식민지의 역사화해는 서양에서도 이루지 못한 난제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상대로부터 배웠던 문명의 콘텐트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알리는 작업이 핵심이 될 것입니다. 과거사 해결은 역사 문제를 직접 다룸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공유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입니다. 미래가 과거를 정리한다는 역발상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양국이 성숙한 관계에 돌입한다면 두 나라가 중심이 되고 중국까지 포함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유럽은 30년 전쟁의 산물인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 쪽으로 진화의 경로를 밟아 왔습니다. 우리도 아시아 특유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수천년에 걸쳐 축적된 뛰어난 문명의 힘으로 유럽이 부러워할 정도의 아시아 평화 경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일본은 불행했던 과거사 정리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역대 일본 지도자들이 나름대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1995년 자민당 사회당 연립정권의 무라야마 총리가 아시아 대상 담화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습니다. 3년뒤인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한일파트너십선언은 이를 계승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담긴 최초의 공식 합의 문서입니다.  
 
 
강제 병합 100년이 된 2010년에는 민주당 정권의 간 나오토 총리가 한반도만을 특정해 반성 사죄를 표명한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3년 고노 관방장관이 담화에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고, 이는 일본 정부의 기본 입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광복 70주년인 2015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최소한 식민지배가 부당하다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자리잡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에 대해서 평가할 것은 평가하고 넘어가는 아량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본 정부나 정치인들이 이를 어기는 발언‧ 행동‧조치를 하지 않도록 하고 역사 교육을 강화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전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기반으로 세계평화와 번영에 앞장서왔고, 한국 경제 발전에 힘이 되어준 존재라는 인식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양국이 역사화해에 도달한다면 유럽 버전의 역사화해를 뛰어넘을 것입니다. 유럽의 역사화해와는 달리 제국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피해국가에 사과와 반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에서 일본을 배타적 감정으로 단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에 함께 나서자고 했습니다. 일본과 싸웠던 김구 선생은 해방이 되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친일파라면,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을 2차세계대전 이후 크게 성장한 문명국이자 경제 안보의 파트너로 대우하면 현재의 갈등은 넘어설 수 있습니다. “과거에 머무른 자는 한 눈을 잃고, 과거를 잊은 자는 두 눈을 잃게 될 것이다”라는 러시아 격언이 있습니다. 한일양국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되 역사의 노예가 돼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한중일 정상회의가 올 연말로 예정돼 있습니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중대한 전기입니다. 스가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간 서한이 오가고 두 정상이 통화도 했습니다. 한일관계를 이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있습니다. 관건은 실제적 조치와 행동입니다.
 
 
초미의 관심사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판결에 따른 일본기업 압류자산 현금화를 그 전까지 막아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스가 총리는 현금화 중단이 보장되지 않으면 한중일 정상회담에 불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사법절차에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특별입법 절차를 통해 일본에 퇴로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현실적인 수순입니다. 일본은 경제 보복 조치를 해제하고 한국은 한일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을 정상화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기업 압류재산의 현금화는 일본기업의 즉시항고‧재항고 절차, 감정 절차, 시장에서의 실제 매각 등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려하는 총리 방한 이후 현금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문제해결을 위한 기회의 창이 열려있는 지금 한일 양국 지도자들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양국 관계가 어려울 때일수록 정상이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의 타협점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저는 양국의 지도자들에게 통큰 타협을 하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먼저 한국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조치를 취하자고 했습니다. “일본이 곤란해하면 굳이 받지 않겠다”라고 정리하자는 것입니다.  
 
 
한국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는 것이지만 국제법적인 약속인 한일협정과 충돌하는 만큼 더 이상 일본을 압박하지 말고 우리 정부와 기업이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한국이 결단하면 일본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난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국은 전향적 용의를 밝힘으로써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를 위해 과거 두차례 배상을 했던 경험을 토대로 국회에서 특별입법을 통해 세 번째의 배상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이 방안을 한국 정부에 제기합니다. 문재인 정부만이 이런 결단을 내릴 위치에 있습니다.
 
 
대신 일본 정부는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강제징용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를 대상으로 솔직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던 2010년 간 나오토 총리 담화를 기반으로 하고, 김대중-오부치 한일파트너십선언처럼 양국 정부간 합의의 형태로 ‘한국인’을 상대로 한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야 합니다. 스가 총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가 해결의 방향으로 나가기 바랍니다. 스가 총리가 방한하지 않으면 한국 내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분위기를 경색시키는 결과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한중일 정상회담 기간중 한일 양자 정상의 회담이 열리고 양국 관계가 개선의 길을 찾기를 기대합니다.
 
 
두 나라의 관계가 개선되면 당장 코로나19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방역협력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유럽처럼 동북아에서도 전력 수퍼그리드를 구축하는 일도 한일 두 나라가 손을 잡으면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유럽은 전력을 이미 모든 국가가 나눠서 쓰고 있습니다.  
 
 
동북아 수퍼그리드 구축은 양국 국민 모두가 상호협력의 생산적 결과를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메가 프로젝트(Mega Project)입니다. 여기 계시는 한일비전포럼 멤버 LS 구자열 회장의 숙원 사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럽통합의 첫 걸음이 석탄과 철강 공동체를 만든데서 시작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일 FTA 체결과 일본 주도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한국이 12번째 국가로 참여하는 일도 급진전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한일관계를 비정치적인 경제통상분야 협력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양국은 신성장동력 분야인 4차산업에서 체계적인 협력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의 SK반도체는 일본 도시바 반도체에 투자하고, 한국의 일본내 투자기업인 네이버 라인이 일본의 야후재팬과 손을 잡았습니다. 양국은 에너지 다소비국가입니다. 에너지‧기후변화‧녹색성장에서 협력이 가능합니다. 표준화와 특허 분야에서도 북미‧유럽과의 경쟁에서 힘을 합쳐 대처할 수 있습니다.  
 
 
2002년 한일공동월드컵 때처럼 도쿄 올림픽에 한국이 적극 협력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과 협력적 태도와 포용적 자세를 가질 때 미국과의 관계를 증진할 수 있고, 중국으로부터도 더 공정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국이 일본, 미국, 중국의 존중을 받는다면 북한도 한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독일과 프랑스는 1963년 아데나워 수상과 드골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엘리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세 번에 걸쳐 큰 전쟁을 했던 두 나라는 지속적으로 인적교류가 확대됐고 관계도 극적으로 개선됐습니다. 두 나라는 유럽 통합의 쌍두마차로 선두에 섰고, 이는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한일 간 연간 1000만명 교류의 시대입니다. 한일 두 나라도 한일판 엘리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합니다.
 
 
일본은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서 북일 국교정상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도울 의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길에 동참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부합하는 이유입니다. 
 
 
수백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일청구권 자금은 북한이 개방됐을 때 경제 개발의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북한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개발 수요는 일본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을 북한 변화의 촉매제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됩니다. 두 나라가 손을 잡아야 할 이유는 이렇게 차고도 넘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약속드립니다. 일본이 우려하는 1965년 한일협정 체제의 동요를 막기 위해 우리 한일비전 포럼을 통해 민간 차원의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코로나가 진정되는대로 유사시 한국 안보의 배후역할을 하는 일본 내 유엔사 후방기지 방문을 추진할 것입니다. 이 곳은 한반도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보급 정보 해상작전을 위해서 사용되는 중요한 기지입니다. 일본 정부와 자위대의 후방 지원이 있어야 원활한 이용이 가능한 시설입니다.
 
한국 방위를 위해 일본은 국외자가 아닌 안보의 안전핀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일비전포럼의 유엔사 후방기지 방문은 한일 양국과 미국의 안보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상징적인 행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현재 경시되고 있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도록 여론을 환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일 양국은 동양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한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두 나라가 손을 잡으면 서구 위주 세계 질서의 위기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출신 아방가르드 예술가인 오노 요코는 “홀로 꾸는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습니다. 두 나라가 아시아 평화 경제 공동체를 만드는데 앞장서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함께 꾸는 꿈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현 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가장 중요한 미션이 될 것입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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