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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시민의식이 깨어 있으면 희망은 있다

중앙일보 2020.10.20 00:17 종합 28면 지면보기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그때로부터 40년이 흘렀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밖이 캄캄했습니다. 창밖을 보니 검은 연기가 가득 창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불이 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역시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 그리고 아이를 돌보아주던 입주 도우미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고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검은 연기가 왈칵 밀려들었습니다. 아파트에 불이 나면 계단 통로가 굴뚝이 되는 것을 그때 처음 겪었습니다. 아기를 안고 문밖을 나가려 하다가는 질식할 상황이었습니다.
 

화재에서 가족을 살려준 소방관
위기 때 이웃을 외면 않은 주민
평범한 국민들이 나라를 지킨다

저는 얼른 문을 닫고 탈출할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안방 창을 열고 커튼을 뜯었습니다. 커튼을 연결해 줄처럼 엮어 쇠로 된 창틀에 묶었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라면 5층에서 위험하나마 어떻게 탈출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아내와 아기 그리고 도우미까지 데리고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습니다. 탈출을 포기하자 연기는 안방까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기를 들어 창밖으로 내밀었습니다. 숨을 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아래쪽에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으나 계단으로의 탈출은 이미 불가능했습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방안 가득 밀려든 연기 때문에 네 명이 담요를 둘러쓰고 엎드려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방문이 왈칵 열렸습니다. 누군가가 뛰어들어와 분무기를 뿌리자 순간적으로 시야가 확보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줄지어 그를 따라 나갔습니다. 방호복 차림의 인명구조 요원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가족을 6층 아파트의 옥상으로 데려다 놓고는 다시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 불은 제 집 아래층에서 발화했는데, 재취로 들어온 여성이 전처의 딸이 도시락 반찬 투정을 하자 홧김에 살해하고는 은폐하려고 방화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다음 날 케이크를 사 들고 소방서를 찾았습니다. 소방대원들이 있는 곳에 갔더니 모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은인을 찾았으나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대 근무에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상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망 중에 그분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 뒤 저는 낯선 곳을 방문하면 비상시 탈출구부터 챙겨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주거 환경이 대거 아파트로 바뀌고 고층 건물이 늘어가면서 탈출구의 확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2012년부터 5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에는 30층마다 하나씩 피난안전구역이 설치돼 있습니다. 층 전체가 불에 잘 타지 않는 자재로 되어 있고, 방독면과 공기 호흡기도 갖춰져 있습니다. 주민이나 방문객의 입장에서는 탈출로와 탈출 장비가 어디에 어떻게 비치돼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긴요합니다.
 
지난 9일 울산 남구 달동의 삼환 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 화재 사건이 문득 40년 전 영등포 시범아파트 화재를 소환시켰습니다. 화재 신고 5분 만에 도착한 소방대원들. 상태가 심각한 20대 여성을 업고 33층을 뛰어 내려온 김호식 소방교와 나머지 주민들을 옥상으로 대피시킨 이정재 구조대장. 15층 피난안전구역에 전진 지휘소를 설치하고 200여 명이 투입돼 교대로 아파트 곳곳을 돌며 인명 수색과 구조에 주력한 일사불란함.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 때 “걱정하지 말라. 모두 살 수 있다”고 격려한 자상함. 여기에다가 몸을 던져 28명을 구조한 2802호 주민 구창식 씨 가족 그리고 어린이와 여성을 앞세우고 줄지어 계단으로 대피한 질서가 ‘사망자 0’이라는 기적을 탄생시켰습니다.
 
가수 나훈아 씨가 언택트 TV 쇼 ‘대한민국 어게인’에서 한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저는 책에서나 살아오는 동안에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나 논개, 윤봉길·안중근 의사, IMF 사태 때 금 모으기에 나선 여러분 같은 평범한 국민들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그날 그가 한 노래는 유행가였으나 그가 한 말은 시(詩)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라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위기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알려준 주민, 쓰러진 우리 식구에게 동치미 국물을 먹여주던 이웃, 몸 바쳐 인명을 구조하고 일이 끝나자 안도와 피로에 지쳐 방화복을 입은 채 땅바닥에서 그대로 잠든 소방관들 그리고 화마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고 모두가 살길을 찾은 시민들입니다. 시민 의식이 깨어 있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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