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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고통의 바다, 세월호 희생자 ‘잘 가라’ 말하기엔…

중앙선데이 2020.10.17 00:20 707호 22면 지면보기

시로 읽는 세상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낭독회가 2014년 10월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비평가 황현산 교수는 그때 읽은 길지 않은 애도의 글 말미에 ‘잘 가라, 아니 잘 가지 말라’는 문장을 두 번이나 적었다. 비명에 간 이들에 대한 애도만이 아니라, 참사에 포괄적 책임을 가진 기성세대의 하나로서 느끼는 곤혹과 자괴 또한 담긴 말이었다. 이 문장의 자기 번복은 기실, 더 착잡한 문맥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태 당시 고2였던 시인의 ‘침투’
물속에서야 허락되는 울음·슬픔
숨이 막혀도 계속 잠수하는 이유

괴로운 체험 강박적으로 되풀이
목숨이 왜 가라앉았는지 규명을

잘 가라고 빌고 싶은데, 그럴 형편이 전혀 못 되었다. 넋을 떠나보내려면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죽음의 원인을 들려주어야 하고, 원혼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야 하고, 연후에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 모든 진혼 절차가 그러하다. 넋을 부르고 달래고 나야 떠나보낼 가망이 선다.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이 중 어느 것도 마련되지 않았다. 잘 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산 자들 중에는 없었다. 잘 가지 말라는 말은 애도의 무능에 대한 탄식이면서 쉼 없이 돌아오는 원혼들의 얼굴을, 삶의 모든 시간에 맞이해야 한다는 쓰라린 확인이었다.
  
‘304 낭독회’서 기약 없이 혼령 달래기
 
그 낭독회는 ‘304 낭독회’라는 이름으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4시 16분에, 지금껏 열리고 있다. 작가, 시인 그리고 시민들은 혼령을 부르고 달래고 떠나보내려는 일을 기약 없이 계속한다. 세월호를 두고 시를 더 쓰지 않아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많은 시가 늘 필요한 건 아니다. ‘쓸 수 없음’이란 방식으로 시인들은 그것과 그이들을 써 왔고 또 쓰고 있다. 쓰지 않는 시간에도 썼으나 그걸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사실 세월호에 대해서라면, 이 나라 온 국민이 마음으로 몸으로 시를 써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올해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다가 어떤 작품 앞에서 든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느라 서두가 길어졌다. 차유오 시인의 ‘침투’라는 시다. 앞부분은 이러하다.
 
 물속에 잠겨 있을 때는 숨만 생각한다
 커다란 바위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바닥으로 물이 들어온다
 나는 서서히 빠져나가는 물의 모양을
 떠올리고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을 잡게 된다
 물결은 아이의 울음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가지 못한 곳까지 흘러가면서
 
 하얀 파동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고
 나는 떠오르는 기포가 되어
 
 물 위로 올라간다
 
말수는 적고, 말투는 조용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시의 화자가 전력을 다해 말하는 것 같다. ‘숨’의 의미는 목숨에 이어져 있다. 숨을 들이마시고 잠수하는 것은 그래서 생사가 걸린 모험에 가까워진다. 물은 손바닥에 들어와 고였다가 빠져나가는데, 그때 여기 없는 사람의 손을 잡게 된다고 화자는 말한다. 물의 움직임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는 상상력은 체험적이란 느낌이 세서, 결별과 재회의 문맥에 숨은 어떤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화된 물은 화자를 ‘가지 못한 곳’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수중 시뮬레이션은 여러 번 있어 온 일이다. 그래서 물속의 화자에게서 죽음 충동을 감지하는 것은 시적으로는 어렵지 않다. 프로이트는 죽음 본능의 존재를 피력한 『쾌락원칙을 넘어서』란 에세이에서 외상성 신경증 환자의 증상에 대해 말한다. 전쟁이나 사고나 폭력의 피해자들이 반복해서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려 한다는 것이 증상의 핵심이다.  
 
그는 이 ‘신비스런 자기 학대적 경향’을 ‘반복 강박’이라 불렀다. 이를 참고할 때, 화자는 불가항력적인 사태와 관련된 괴로운 체험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는 것 같다. 시의 후반부이다.
 
 숨을 버리고 나면
 가빠지는 호흡이 생겨난다
 
 무거워진 공기는 온몸에 달라붙다가
 흩어져버린다
 
 물속은 울어도 들키지 않는 곳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지워준다
 
 계속해서 투명해지는 기억들
 이곳에는 내가 잠길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있다
 
 버린 숨이 입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내면의 심층이자 고통의 바다일 물속에서 탈진한 채 화자는 밖으로 나온다. 목숨은 간신히 호흡이 된다. 물 밖의 시간도 물론 쉽지 않다. 울음과 슬픔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물속에서야 어렵사리 허락되는 것이다. 숨 막히는 물속으로 거듭해 상상의 잠수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물은 ‘이곳’에, 그러니까 슬픔이 ‘침투’해 오는 모든 곳에 있다. 고통과 그리움의 또 다른 되풀이를 암시하면서 시는 멈춘다.
 
이 괴로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슬픔에 끝이 있을까. 프로이트는 같은 글에서, 어머니 없이 혼자 남겨진 손자의 실패 놀이를 언급한다. 어린 손자는 실패를 던지며 "fort(가버린)”라 괴롭게 부르짖고, 그걸 다시 끌어당기며 "da(거기에)”하고 기쁘게 외친다. 실패를 거듭 던지는 동작은 어머니가 곁에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걸 끌어당기는 동작엔 어머니의 나타남에 대한 상상의 희열이 스며 있다. 실패 놀이는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꾸려는 본능의 발로다. 고통의 강박적 반복은 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통의 완화를 향해 움직여갈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재난에 국가는 없어
 
시를 좀 어둡게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차유오 시인은 1997년생이다. 그때 고2였던 친구들의 시가 나오기 시작하는 걸까. 지난 십여 년 동안 바다에서 벌어진 재난들은 성격과 원인이 다 같지는 않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서 국가의 존재를 잘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태 대응, 원인 규명, 해결 과정 전체에 걸쳐서 그러했다. 이 정부를 촛불 정부라고들 한다. 돌아보면 ‘촛불’의 가장 뜨거운 부위가 바로 세월호였다. 육년 반이 지났다.
 
지금, 국가는 어디 있는가. 그 배가 어떻게 가라앉았는지, 왜 그 많은 목숨들이 함께 가라앉아야 했는지 똑똑히 듣고 싶다. 그래서 ‘잘 가지 말라, 아니 잘 가라’고 말해 보고 싶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을 냈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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