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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전 남친과의 추억이 죄" 때려도 참는 가스라이팅 비극

중앙일보 2020.10.15 05:00

“제 죄는 7년 사귄 전 연인과 연애한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4개월간 만난 남자친구 A씨에게 데이트폭력을 당한 피해 여성 B씨가 14일 한 말이다. 지난달 말 20대 남성 A씨는 ‘전 남자친구에게 했던 것보다 더 잘해주지 않았다’며 B씨를 주먹으로 수차례 폭행했다. B씨는 남자친구 집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보복을 우려해 A씨가 자는 틈을 타 다음 날 오전 9시쯤 방에서 빠져 나와 112에 신고했다. 현재 이 남성은 폭행ㆍ감금 혐의로 이달 초 검찰에 구속 송치된 상태다.  
 
데이트폭력 일러스트.

데이트폭력 일러스트.

 
A씨는 여자친구의 전 연인을 거론하며 무리한 요구를 일삼았다고 한다. A씨는 술을 마시지 못한 B씨에게 “전 남자친구와 술을 3잔 마셨으니 나와는 더 마셔야 한다”고 강요했다. B씨가 “나는 평범한 연애를 한 것일 뿐이고 잘못한 게 없다”고 얘기하자, 이 남성은 “전 연인과 추억이 있는 것도 잘못한 것”이라고 되받아쳤다. B씨는 지난 8월에도 비슷한 일로 A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용서를 빌던 A씨에 마음이 약해진 B씨는 처벌불원서를 냈다.
 

괴로운 데이트폭력,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Gaslightingㆍ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에 따른 피해도 컸다. B씨는 “연인 관계다보니 상대를 자꾸만 이해해주려고 했다”며 “맞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데 세뇌를 당해서 그런지 멍 사진을 보면 이게 많이 맞은 게 맞나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A씨가 폭력을 행사할 때 외에는 정말 잘해줬다”며 “달콤함에 속아 ‘변할 수 있겠지’라는 잘못된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말 데이트폭력 피해를 입은 A씨. [독자 제공]

지난달 말 데이트폭력 피해를 입은 A씨. [독자 제공]

 
가스라이팅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무리한 요구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데이트폭력은 전 연인 상대를 거론하거나 ‘밤늦게 다니면 위험하다’는 식의 안전 명목 등으로 행동을 통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이렇게 해야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가스라이팅의 큰 문제는 폭력을 폭력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라며 “무엇보다 폭력을 관심이나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고 강조했다.
 

데이트폭력 증가…제도 보완 시급

데이트폭력 범죄는 느는 추세다. 지난달 28일 발간한 ‘「KOSTAT통계플러스」 2020년 가을호’에 실린 ‘데이트폭력의 현실, 새롭게 읽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청 전국자료로 집계된 데이트폭력 신고 건수는 1만9940건으로 집계됐다. 2017년(1만4136건)보다 41.1% 증가한 수치다. 실제로 지난 7월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주택에서 20대 남성이 헤어진 여자친구를 유인해 성폭행하고 협박해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데이트폭력 일러스트. 중앙포토

데이트폭력 일러스트. 중앙포토

 
문제는 데이트폭력에 대한 처벌이 여전히 쉽지 않다는 점이다. 데이트폭력은 관련 특별법이 부재해 형법상 폭행죄 적용을 받는 경우가 많다. 형법상 폭행죄는 반의사 불벌죄로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경우 처벌할 수 없다. 가해자의 협박·회유로 두려움을 느낀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셈이다. 사실상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무력해지는 제도적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는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데이트 폭력이 발생해도 형법상 폭행죄로 가게 되면 협박 받은 피해자가 합의하게 되고 피해 사실이 증발한다”며 “피해자 신변 보호와 가해자 접근금지 등 임시조치가 가능한 가정폭력처벌법을 UN에서 명명한 ‘파트너폭력 처벌법’으로 대폭 개정해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혼인 신고하지 않은 상대에 대해서도 임시 조치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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