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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감자빵 갑질’ 비난 전 유의사항

중앙일보 2020.10.15 00:15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영선 산업1팀 차장

전영선 산업1팀 차장

현장에서 판단하기에 쉬운 갑질 사건이 있다. 힘센 갑이 약한 을에게 물컵을 던지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거나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납품의 대가로 뒷돈 요구한 뒤 관행으로 포장하는 따위의 일들이다. 이럴 때 판단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세상이 좀 투명해졌는지 ‘선명한 갑질’이 뜸한 대신 누가 갑과 을인지부터 흐릿한 일들이 자주 보인다. 그래서 갑질을 욕하기에 앞서 세 가지를 살피면 좋다.
 
먼저 누가 갑이고 을인지는 잠시 잊어 보자. 갑은 강하고 을은 약하기 때문에 갑이 나쁘다는 결론으로 쉽게 건너뛸 수 있다. 물론 이 공식이 맞을 때도 잦다. 하지만 당연한 얘기로, 을이 잘못할 때도 있다. 의식의 흐름이 반사적으로 ‘갑-강한-나쁜’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단계다.
 
SPC 그룹의 파리바게뜨가 농가돕기를 위해 출시한 ‘강원도 감자빵’의 경우 이런 의식 흐름 3단계를 타기에 알맞은 사건이다. 전국에 가맹점 3300개 넘는 국내 제빵 1위 프랜차이즈가 지역에서 애쓰는 작은 푸드 스타트업, 카페 감자밭의 젊은 사장의 아이디어를 허락 없이 베꼈다는 내러티브는 눈길 끌기 좋은 내용이다.
 
노트북을 열며 10/15

노트북을 열며 10/15

하지만 감자빵 사태의 전말은 이 주장과는 차이가 크다. SPC 관계자는 “개발 일정이 있어 과거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아이디어를 얻다 보니 생긴 일”이라고 설명했다. 2018년 파리바게뜨 중국 본부에서 팔던 ‘미스터 포테이토’라는 감자빵을 참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보다는 ‘밉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한 세상. 파리바게뜨는 바로 감자빵 생산을 중단했다.
 
둘째, 을이 과연 을인지를 봐야 한다. 감자빵 문제를 제기한 카페 감자밭은 전도유망한, 떠오르는 업체다. 줄서서 먹는 감자빵은 이미 지역 명물이고, 해바라기밭이 유명한 예쁜 카페는 인스타그램 명소다. 유명세에 힘입어 서울 여러 백화점에서 입점했다. SPC와 특별한 계약관계는 없다. 을로 규정하는 건 실례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이 충분히 세심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좋은 취지’ ‘의도와는 달리’와 같은 설명은 사실 여부를 떠나 대중의 분노만 산다. 이번 사태에서 파리바게뜨가 올해 감자빵 유행에 막대하게 기여한 업체가 있다는 것을 미리 파악했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 가지를 고려한 뒤 내린 결론은 SPC 감자빵 표절 사태는 그래도 대기업 갑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세심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SPC의 강원도 감자빵 판매 중단 결정으로 의미 없는 지적이 돼 버렸다. 또 한번 헛소동에 사회가 과도하게 에너지를 쏟았다는 게 유감이라면 유감이다.
 
전영선 산업1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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