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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녹취

중앙일보 2020.10.15 00:11 종합 33면 지면보기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신참 기자 시절, 고위급 취재원과의 술자리에 참석했을 때 부장이 신신당부했다. “취재원 얘기를 기억해뒀다가 정리해서 줘라. 그걸 잘하는 것도 능력이야.”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만난 취재원 앞에서 수첩을 꺼내 들 수는 없는 노릇. 수시로 화장실로 가서 수첩에 주요 내용을 적어뒀다. 다음날 꺼내본 수첩 속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워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기자가 된 뒤 상당 기간, 인터뷰할 때 수첩을 펼치고 받아 적었다. 가급적 취재원과 눈을 맞추려면 수첩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글씨를 빨리 쓰는 것이 중요했다. 발언 내용뿐 아니라 얼굴 표정, 분위기, 말투까지 적느라 손이 바빴다. 취재원들은 “도대체 뭐라고 수첩에 썼어요?”라며 신기한 듯 들여다봤다. 그렇게 늘어난 수첩이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 한동안 고이 간직해뒀다. 실제 다시 펼쳐볼 일은 거의 없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현장 취재 땐 수첩부터 챙겨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질의응답을 나눌 때 수첩을 꺼내 든 기자는 나밖에 없었다. 다른 기자들은 모두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녹음했다. 남보다 뒤늦게 녹음기능을 쓰게 됐다.
 
녹취는 하긴 편하지만 나중에 풀기는 귀찮다. 수첩에 받아 쓰는 것보다 시간이 두 배로 걸린다. 하지만 장점이 많다. 무엇보다 안전하다. 오타나 실수로 발언 내용이 왜곡될 가능성이 없다. 또 생생하다. 현장에서 놓쳤던 부분을 녹취에서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날 것이어서 갖는 힘도 있다. 때론 강력한 공격무기도, 든든한 안전장치도 될 수 있다.
 
수첩의 시대는 가고 녹취의 시대가 왔다. 국정농단 수사 땐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이 ‘스모킹 건’ 역할을 했다. 대통령 지시사항을 빼곡히 적은 수첩은 유죄 입증에 결정적 증거가 됐다.
 
요즘엔 주요 사건마다 녹취가 가장 화끈한 ‘한방’이다. 라임 사태가 단순 금융사기 이상일 거란 의혹에 불을 붙인 건 방송인 김한석씨가 공개한 청와대 행정관 관련 녹취였다. 취재 방식의 적절성 논란은 있지만, 이른바 ‘검언유착’ 의혹 사건에서 해당 기자가 역공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검사장과의 녹취록 전문을 공개하면서였다. 최근엔 옵티머스 사태와 관련해 녹취록들이 속속 나오면서 로비 의혹이 커지고 있다.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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