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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포도로 만든 ‘비건 가죽’…진짜 가죽보다 더 진짜 같아

중앙일보 2020.10.14 11:04
가죽 재킷, 가죽 바지, 가죽 스커트, 가죽 셔츠까지. 올가을 유난히 가죽 소재의 패션 아이템이 강세다. 강렬한 느낌을 주는 일명 ‘센 언니’ 룩이 주목받고 있는 데다, 성별의 경계가 없는 중성 룩이 인기를 얻으면서다. 특히 요즘 나오는 가죽 옷에는 ‘비건’ ‘에코’라는 설명이 많이 붙는다. 송아지가죽·양가죽 등 진짜 동물 가죽임을 강조했던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다.  
'센'언니의 필수품인 가죽 재킷이 착해졌다. 동물을 착취하지 않는 비건 가죽, 에코 가죽으로 만든 가죽 패션이 인기다. 사진 앳코너

'센'언니의 필수품인 가죽 재킷이 착해졌다. 동물을 착취하지 않는 비건 가죽, 에코 가죽으로 만든 가죽 패션이 인기다. 사진 앳코너

 

착한 가죽만 취급합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여성복 브랜드 ‘보브’는 지난 8월 ‘에코 레더 컬렉션’을 출시했다. 진짜 가죽 같은 질감과 광택의 인조 가죽으로 만든 숏 재킷·셔츠·버뮤다팬츠 등 구성도 다양하다. 한두 개 구색 맞추기로 에코 가죽(인조 가죽) 제품을 내놓은 게 아니라 하나의 컬렉션으로 구성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박상은 보브 마케팅 담당자는 “지속 가능성과 착한 패션이 주요 화두인 데다 MZ 세대 소비자를 중심으로 가치 소비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별도의 에코 레더 컬렉션을 기획했다”고 했다. 반응도 좋은 편이다. 일부 인기 상품의 경우 출시 한 달 만에 판매율이 80%에 달했다.  
여성복 브랜드 '보브'가 내놓은 '에코 레더 컬렉션'. 인조 가죽 제품들로만 구성됐다. 사진 보브

여성복 브랜드 '보브'가 내놓은 '에코 레더 컬렉션'. 인조 가죽 제품들로만 구성됐다. 사진 보브

 
LF의 여성복 브랜드 ‘앳코너’는 봄에 이어 가을에도 에코 가죽 제품들을 내놨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표면을 실제 가죽처럼 재현하고 색도 다양하게 구성한 게 특징이다. 10월 12일 기준으로 초도물량은 완판됐고, 3차 재주문이 들어간 상태다. 이 밖에 H&M‧자라 등 주요 패스트 패션 브랜드에서도 에코 가죽 제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짜 가죽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가벼워서 선호도가 높다. 물론 동물 가죽을 사용하지 않은 ‘윤리적 패션’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인기 요인이다.  
 

레자의 신분 상승, 비건 가죽이 뭐길래

에코 가죽은 ‘비건 가죽’으로도 불린다. 비건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라는 뜻이다. 동물 원피를 활용해 만드는 기존 가죽과는 반대 개념으로 동물 재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폴리우레탄 등 합성 성분을 가공해 만든 인조 가죽이 에코 가죽, 비건 가죽의 대표 주자다. 과거 값싼 인조 가죽의 대명사로 불렸던 ‘레자’의 완벽한 신분상승이다. 최근엔 인조 가죽이 동물의 권리를 생각하는 ‘착한 소재’로 인정받고 있다. 가공 기술이 좋아져서 예전만큼 인조 느낌도 덜 난다.  
인조 가죽이지만 가공 기술이 좋아져 광택이나 질감, 내구성 등에서 진짜 동물 가죽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도 인기 요인이다. 사진 지컷

인조 가죽이지만 가공 기술이 좋아져 광택이나 질감, 내구성 등에서 진짜 동물 가죽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도 인기 요인이다. 사진 지컷

 
모피·가죽뿐만 아니라 양모와 실크, 오리털 및 거위 털 등 동물을 착취해 생산하는 모든 소재를 거부하는 윤리적 패션 브랜드 ‘비건 타이거’의 양윤아 대표에 따르면 현재 인조 가죽 가공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보통 면에 실리콘 코팅을 입혀 가죽 느낌을 내는데 실제 동물 가죽 표면의 오돌토돌한 요철과 미세한 상처, 모공 표현까지 가능하다. 실제 동물 가죽의 최대 장점인 내구성과 보온력도 어느 수준까지 따라잡았다고 한다. 양 대표는 “품질 좋고 가격도 저렴한 훌륭한 대체품이 있는데 굳이 동물을 착취하는 진짜 가죽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라고 말했다.
광택이나 질감, 색감을 파격적으로 연출해 대놓고 '인조' 가죽임을 티내기도 한다. 사진 비건 타이거

광택이나 질감, 색감을 파격적으로 연출해 대놓고 '인조' 가죽임을 티내기도 한다. 사진 비건 타이거

 
비건 가죽, 에코 가죽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인 데다 값이 저렴해 남용되기 쉽다. 철마다 사서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이 비판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 동물 가죽도 환경오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물의 가죽이 썩지 않게 가공하는 과정에서 많은 화학 약품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베지터블(Vegetable·채소) 가죽’이 환영받고 있다. 동물 가죽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중금속 성분의 화학제품은 제외하고 식물성 섬유 추출물을 사용한 가죽이다. 가공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환경적 영향을 줄일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베지터블 가죽 역시 동물의 원피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건 혹은 에코 가죽으로 분류되기는 어렵다.  
 

선인장‧파인애플‧한지로 가죽 만든다

보다 엄격하게 분해가 쉬운 식물 성분 가죽만을 에코 가죽, 비건 가죽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해외에선 선인장·파인애플·버섯 등 식물로 만든 가죽이 생산되고 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앤아더스토리즈’는 지난 4월 버려지는 포도 껍질·줄기·씨로 만든 가죽 ‘비제아(VEGEA)’를 사용해 샌들을 출시한 바 있다.  
포도 껍질과 줄기, 포도씨로 만든 가죽 소재 '비제아'를 활용한 샌들. 사진 앤아더스토리즈

포도 껍질과 줄기, 포도씨로 만든 가죽 소재 '비제아'를 활용한 샌들. 사진 앤아더스토리즈

 
국내에선 한지를 사용해 가죽을 만든다. 원단회사인 한원물산의 한지 가죽 ‘하운지’다. 면에 한지를 발라 가죽의 질감을 만들고 수용성 코팅으로 방수 기능을 더했다. 인조 가죽보다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데다 면과 종이가 주재료기 때문에 버려도 땅속에서 쉽게 분해된다. 지난 3월 국내 패션 브랜드 ‘스튜디오 톰보이’가 이 한지 가죽으로 스커트·팬츠·블라우스를 만들어 출시했다. 정우한 한원물산 대표는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패션 브랜드들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 올해 9월 기준 지난해보다 매출이 2배 이상 성장했다”고 말했다.  
하운지의 악어 가죽. 면과 한지를 활용해 진짜같은 가죽 질감을 구현했다. 사진 한원물산

하운지의 악어 가죽. 면과 한지를 활용해 진짜같은 가죽 질감을 구현했다. 사진 한원물산

 
동물 가죽이지만 윤리적 지침을 지켜가며 가죽을 생산하는 방식도 있다. 영국 패션 브랜드 ‘멀버리’는 지난해 12월 100% 지속 가능한 가죽 가방 ‘포토벨로 토트백’을 출시했다. 브랜드 측에 따르면 가죽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가축을 도축한 게 아니라, 식육 산업의 부산물로 남겨진 가죽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를 꿰매는 데 쓰는 실도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섬유인 ‘에픽에코베르데’를 사용했고, 부자재도 재생 원사와 금속을 썼다.    
가죽을 채취하기 위해 도축하는 것이 아니라, 식육 산업의 부산물로 남겨진 가죽을 얻어 만든 '포토벨로 토트백'. 사진 멀버리

가죽을 채취하기 위해 도축하는 것이 아니라, 식육 산업의 부산물로 남겨진 가죽을 얻어 만든 '포토벨로 토트백'. 사진 멀버리

 
잔혹한 포획 및 도살로 만들어지는 동물 가죽은 패션계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진짜보다 멋진 가짜인 인조 가죽이든, 최소한의 윤리성을 지닌 진짜 가죽이든, 보다 사려 깊은 소비가 주목받고 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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