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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김정은, 칼날 위에 서다

중앙일보 2020.10.14 00:38 종합 35면 지면보기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열병식에서 김정은은 신형 무기를 선보임으로써 미국과 한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고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외칠 정도로 자신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아마 북한 주민이 주는 압박 때문일 것이다. 실상 그는 집권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 제재에다 코로나 위기, 자연재해가 겹쳐 올해는 농업, 공업, 서비스업 모두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코로나 방역을 위한 대외 봉쇄와 국내 이동 제한 조치는 북한경제의 동력인 무역과 시장 활동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최악의 경우엔 올해 성장률이 -10%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 경우 제재가 본격화된 2017년부터 올해 말까지 북한의 국민소득은 이전 대비 20% 가까이 감소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의 3분의 2쯤 되는 충격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김정은, 집권 이후 최대 위기 맞아
최악 경우 올 성장률 -10% 될 수도
북한 주민은 핵보다 경제 원해
한·미, 비핵화에 집중력 유지해야

김정은도 경제 위기를 인정하고 있다. 8월 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그는 “국가 경제의 장성 목표들이 심히 미진되고 인민생활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하는 결과도 빚어졌다”고 자인했다. 그러나 이마저 반은 틀렸다. 인민생활이 향상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대폭 후퇴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탈북민 설문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분석한 결과, 대북제재는 북한 가계소득의 중앙값을 20% 이상 감소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동안 무역과 외화벌이, 대규모 시장 활동으로 큰돈을 벌던 부유층의 소득이 현저하게 줄었다. 김정은 정권의 핵심 지지층이 역설적으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것이다. 여기에 올해의 충격까지 더해진다면 가계소득은 제재 이전 대비 30% 이상 하락할 수 있다.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로 번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정은도 이를 의식하고 행동하는 듯하다. 그 예로 작년엔 한 달에 두 번꼴로 하던 경제 분야 현지지도를 올 상반기엔 두 번밖에 하지 않았다. 8월부터 그 횟수가 다소 늘어났지만 수해 복구 현장처럼 자신이 정치적 점수를 딸 것이 확실한 경우에 국한됐다. 공장과 건설 현장, 백화점, 양어장을 거침없이 다니며 일일이 지시하던 예년의 자신감이 사라졌다. 마치 최약체 투수가 나올 때만 타석에 나오는 위기의 4번 타자 같다. 그렇게라도 안타를 쳐야 할 만큼 주민 지지가 절실하다는 뜻이다.
 
북한 주민은 김정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김정은에 대한 주민 지지도는 평균 50~60%다. 이 수치는 그의 집권 이래 큰 변화가 없다. 이는 북한 정권이 나름대로 안정적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핵 개발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오르지 못한 것은 핵으로써는 주민의 마음을 얻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북한 주민에겐 먹고사는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하지만 제재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를 해결할 마땅한 방안이 없다는 것이 김정은의 딜레마다.
 
북한 주민은 자본주의를 원한다. 탈북민 중 70%가 북한에 거주할 당시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를 더 지지했다고 하며, 장사와 기업 설립, 고용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믿는 이들은 90%나 된다.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 군사비를 과다 지출하는 등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이 경제난의 이유라고 생각하는 탈북민이 전체 응답자의 80%를 넘는다. 북한 정권이 아무리 제재와 자연재해 등의 외부 요인을 강조해도 근본 문제는 내부에 있으며 이는 결국 김정은의 책임임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국외에 거주하는 북한 주민을 간접 조사해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온다.
 
김정은은 핵을 택하고 경제를 버림으로써 칼날 위에 섰다. 정확히 말하면 제재가 김정은이 노렸던 핵·경제 병진 노선을 핵·경제 상충 구조로 바꾸었다. 핵과 경제를 동시에 쥐고 장기 독재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제재와 코로나의 이중 차단벽에 막혔다. 반면 북한 주민의 의식은 고난의 행군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보했다. 이들은 김정은을 정치 지도자로서 인정하지만 대신 경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 나아가 자본주의 도입까지 원하고 있다. 이처럼 높아진 주민의 요구를 계속 충족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통치 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다.
 
비핵화의 동력은 살아 있다. 제재가 만들어 놓은,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강화한 구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작동하는 한 김정은은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이 빨리 열리기 바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외교의 최우선 과제는 차기 미국 정부가 북한 문제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종전선언으로 비핵화의 문을 열겠다는 우리 정부의 구상은 역효과를 낼 우려가 있다. 한국 정부와 보조를 맞추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가뜩이나 중국 문제에 전력을 기울이고 싶은 차기 미국 정부는 북한 비핵화를 정책 우선순위에서 제외할 수 있다. 경제난으로 더 기다리기 어려운 북한이 이에 맞서 거세게 도발하면 한반도에 군사 충돌의 위험이 다시 커질지 모른다. 우리 정부가 ‘북한 읽기’와 한미공조에 실패하면 한반도 전체가 칼날 위에 서게 될 수도 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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