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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특별기고] 수명 다한 대통령제, 이젠 벗어던지자

중앙일보 2020.10.14 00:35 종합 25면 지면보기

싸우는 정치에서 생산성 높은 정치로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싸움의 정치가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 원천은 대통령 중심제라는 제도다. OECD 37개 국가 중 우리 같은 싸움판 정치에 신음하며 사는 나라는 통틀어 4개국 정도다. 바로 칠레·멕시코·콜롬비아·터키 등이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모두 우리와 같은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 중 31개국은 내각제(23개) 아니면 이원집정제(8개)다.
 

미국 제외한 선진국 중 대통령제 채택한 나라 없어
대통령제 택한 남미 국가선 쿠데타·정쟁 끊이지 않아
세계대전 승리한 영국, 부자 나라된 이스라엘은 내각제
생산성 높이고 지속가능한 발전 위해 개헌 결단해야

의미심장한 점은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국가들에선 우리 같은 처절한 ‘싸움의 정치’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만이 대통령 중심제이면서도 별로 싸우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그 이유는 미국은 연방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연방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행사하는 권력의 종류와 질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원초적으로 그렇게 싸울 일이 별로 없다.
 
우리 같은 싸움판 정치 체제를 가진 남미의 4개 나라 국민들은 사실 대한민국 국민만큼이나 불행하다.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 정권은 17년간 무려 10만명의 시민을 고문하거나 학살함으로써 세계적인 악명을 떨쳤다. 멕시코는 20세기 초반에 무려 77년 동안 한 개의 정당이 집권해 왔다. 그 폐해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내각제로 순조롭게 발전해 오던 터키는 2014년 대통령제로 바꾼 후  2년 만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지금도 피나는 정쟁의 회오리가 계속되고 있다. 콜롬비아도 정치판에 무장 대립이 발생할 정도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불행한 이 나라들은 경제적으로는 어떤가?  모두 OECD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GDP가 1만 달러 대다. 대한민국의  3분의 1도 안된다.
 
무척 의미 있는 통계가 또 하나 있다. 세계를 통틀어 1인당 GDP가 우리보다 높은 26개 나라 중에 우리 같은 대통령 중심제를 택하고 있는 곳은 미국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22개가 내각제, 나머지 3개가 이원집정부제다. 이쯤 되면 대통령제가 풍요한 나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불행히도 우리 국민의 너무나 많은 다수가 내각제에 대한 불신과 대통령제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1960년 4·19 후 처음 시도해 봤던 내각제에 대한 나쁜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때 오랫동안 독재에 신음하다 자유를 얻게 된 시민들이 해방감에서 무분별하게 뛰쳐나와 일시적으로 데모 홍수가 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때문에 사회 불안과 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각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사실 그것은 국민의 힘에 의해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된 나라에 거의 예외 없이 일어나는 초기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었다면 다른 대부분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안정에 대한 외침들이 터져 나오면서 서서히 내각제가 정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내각제 하에선 우리 같이 사생 결단하는 싸움이 없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대통령제에서는 왜 맨날 싸움판이 벌어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대통령제는 ‘승자 독식’의 제도다. 승리한 당이 모든 것을 가져가고, 또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이 독점적 경직성은 필연적으로 격렬한 싸움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내각제는 그렇지 않다. 내각제는 언제라도 거의 모든 이슈에서 여야가 서로 타협해서 원만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해결책을 담아낼 수 있는 제도적 그릇이 있기 때문이다. 1개 정당이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2~3개 정당이 연합하여 내각을 공동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의논하고 타협하면서 국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보수와 진보의 연합 정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경제 장관은 보수당 의원이 맡아 전체 경제를 키우고 복지부 장관은 진보당 의원이 맡아 약자를 챙기는 정책을 시행해나가되, 상충되는 부분은 내각 내에서 서로 의논해 나가며 헤쳐나갈 수 있다. 타협이 불가능하면 언제든지 국회 해산을 하고 다시 총선을 해서 국민의 뜻을 물어보면 된다. 한 마디로, 내각제는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고 정치인들이 서로 끊임없이 토론하고 타협하면서 정치를 해 나갈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가진 제도다.
 
내각제 때문에 절대 국가가 나약해지지 않는다. 도리어 무한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내각제다. 가장 웅변적인 예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사방에 적대적 아랍국가들에 둘러싸여 70여년간 무려 8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매번 승리했을 뿐 아니라 국민소득 4만5000달러의 부유한 국가를 만들었다. 영국은 내각제를 채택해 1,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뒀고, 일본 역시 내각제로 30~40년간 아시아의 맹주 노릇을 했다. 독일도 내각제에 기반해 통일을 이뤄냈다.
 
이 모든 것의 핵심 요인은 하나다. 내각제에는 정치판에 항상 생성될 수밖에 없는 ‘싸움의 에너지’를 ‘생산적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제도적 틀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같은 이원집정부제도 하나의 가능한 대안이다. 다만 이원집정부제는 국가에 따라 다양한 모델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맞는 모델을 만드는 데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볼 때, 대통령 중심제가 가장 좋은 제도라는 집착은 환상에 가깝다. 사실은 제헌국회 당시 의원들이 내놓은 안도 내각제였다. 그러나 미국식 교육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고집하는 바람에 결국 대통령제를 시행하게 됐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과 판이한 우리의 정치 현실과 사회 풍토 등을 세심히 고찰하지 못한 채 밀어붙인 게 실착이었다.
 
대선 과정에서 개헌을 공약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1년 후 개헌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그 안은 내용적으로나 절차적으로 참으로 부실했다. 개헌안에 권력 구조에 대한 것은 한 마디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헌법이 정해놓은 절차를 어기고 법무부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의 비서인 민정수석이 개헌안을 발표하게 했다. 헌법을 마치 ‘시행령’ 취급한 것이다. 이러니 당연히 국민의 외면을 받았다.
 
1987년 9차 개헌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로 바꾼 이래 30년 넘게 이어오면서 여러 차례 개헌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때마다 개헌을 정치적 유·불리로만 재단해온 정파들의 이해관계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이제 개헌은 정략적·정치적 이해를 뛰어넘는 문제가 됐다. 싸우지 않는 정치를 통한 생산성 높은 국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려면 이제 정말 개헌을 결단해야 한다.
 
또 하나의 선택, 이원집정부제의 명암
현재, 세계적으로는 내각제 국가가 약 80개국, 대통령제가 68개국, 이원집정제가 약 40개국 정도다.
 
대통령제 국가 중에 선진국은 미국과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원집정제 국가 중 선진국은 프랑스 딱 하나밖에 없다. 우리가 아는 선진국들은 거의 내각제 국가다. 한마디로, 대통령 중심제는 덜 성숙한 국가와 국민이 택하는 제도란 얘기다.
 
옛날, 국민이 미개하고 배우지 못했을 시절에는 군중을 이끌 한 명의 압도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왕이란 제도가 생긴 것이다.
 
대통령제는 국왕제에 가장 근사한 제도다. 다만 임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권력의 맛이 너무 좋기 때문에 내려오려고 하지 않거나, 집권당이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대통령제의 근원적 결함이자 한계다.
 
이원집정제는 엄청나게 큰 대통령의 권력을 총리와 나눈다는 면에서 권력 분산이라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대통령과 총리가 다른 당에서 나올 경우, 국정 혼란이라는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는 제도다. 프랑스가 이 리스크 때문에 한동안 엄청난 고생을 했다.
 
이원집정제는 확실히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도입해서 정착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가 일어날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선진국 대한민국이 아직도 비효율적인 대통령 중심제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무척 창피한 일이다.
 
전성철 글로벌 스탠다드 연구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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