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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청소하다 얼떨결에 유괴…‘성실한 범죄자’ 유재명

중앙일보 2020.10.14 00:03 종합 22면 지면보기
15일 개봉하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는 범죄조직 하청을 받아 성실하게 시신 처리를 하던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이 얼떨결에 부잣집 소녀 초희(문승아)를 유괴하면서 벌어지는 아이러니한 일상을 담은 장르 전복 범죄영화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15일 개봉하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는 범죄조직 하청을 받아 성실하게 시신 처리를 하던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이 얼떨결에 부잣집 소녀 초희(문승아)를 유괴하면서 벌어지는 아이러니한 일상을 담은 장르 전복 범죄영화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토록 성실한 범죄꾼이 있을까. 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신 처리를 전담하는 그의 ‘무기’는 칼이 아닌 청소용 고무장갑이다. 다리를 저는 신체 한계 속에서도 계란장수 ‘투잡’을 뛰고 “매사에 감사하라”를 잊지 않는 신앙인이기도 하다.
 

홍의정 감독 ‘소리도 없이’ 창복 역
유아인과 호흡 ‘죽지 않는’ 존재감
“관객 끌고가려 유머에 신경 많이 써”
‘응팔’‘이태원 클라쓰’ 이어 또 변신

시신 묻을 때 풍수를 따지는 근면성까지 도달하면 생계형 범죄, 일상이 된 죄악을 넘어 현대인의 맹목적 직업윤리를 풍자하는 건가 싶다. 15일 개봉하는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에서 배우 유재명(47)이 연기하는 ‘어쩌다 유괴범’ 창복 얘기다.
 
“처음 시나리오 읽었을 때 글이 주는 쾌감이 컸다. 창복은 비루하고 남루한 삶을 살다가 떠밀리듯 사건에 휘말린다. 의도치 않은 악행도 악인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세계관, 인간의 아이러니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유재명

유재명

1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아이러니’ ‘우연’ ‘어쩌다’ 같은 말을 자주했다. 창복은 형제처럼 거둬 지내온 태인(유아인)과 함께 ‘시체청소’를 하다 얼떨결에 부잣집 소녀 초희(문승아)를 유괴하는 신세가 된다. “죄책감과 겁은 나지만 어느 날 일이 들어왔고 조직의 말단이라 하게 된” 그는 여느 조폭들의 험악한 문신과 대비되는, 40대 아저씨의 흔한 ‘눈썹 문신’을 했다. 범죄 현장의 잔혹함엔 무심하고 그들이 흘린 핏자국에 혀를 끌끌 차며 청소하는 “애매하게 평범한” 인물이다.
 
“말은 많이 하는데 의미 있는 말은 별로 없는, 자기 주문처럼 떠드는 스타일이다. 태인이 말 한마디 없는 캐릭터라 창복의 대사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유아 납치라는) 무거운 상황에서 친근함과 유머가 배어 나와야 관객을 끌고 갈 수 있어서 템포 조절에 특히 신경 썼다.”
 
실제로 사투리 억양 속에 툭툭 던지는 말투가 영화에 일상성을 더한다. 극 초반 계란을 팔며 8000원을 8000만원이라고 농치는 애드리브는 ‘길거리 사람들’을 오래 관찰한 습관에서 나왔단다. 인질 몸값에 있어 남녀 차별을 푸념하는 모습이라든가 하층 계급 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채무 싸움은 마치 ‘기생충’의 부조리를 떠올리게 한다. 땅의 핏자국에 꽃잎을 그려 넣는 초희, 노을 진 시골마을 논길을 자전거로 달려가는 태인 등 화사한 색감의 천연덕스러운 일상 속에 “유재명의 생활형 연기가 약간 붕 뜬 분위기 속 현실감을 잡아줬다”(홍의정 감독)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어른스러운 소녀(초희)와 덜 큰 어른남자(태인)의 대비를 먼저 생각했다”는 홍 감독은 태인의 다른 대립항으로 창복을 설정했다고 한다. ‘폼 나는 양복’을 욕망하는 태인과 달리 창복은 현재에 만족하며 잔소리를 해대고 인생 ‘롤모델’을 자처한다. 계획에 없던 유괴범이 됐을 때도 ‘프로’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하는 어수룩함이 어딘가 짠하다. 영화를 위해 15kg 살을 찌운 유아인이 후반부를 홀로 리드할 때도 유재명이 깔아놓은 이 같은 공감대 덕에 끝까지 긴장감이 유지된다.
 
“갑작스럽게 ‘헛발질’로 인해 사라지는 설정까지 창복에게 걸맞은 마무리 같다”는 그는 앞서 tvN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도 사라졌지만 가시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다. 2017년 시즌1 당시 이창준 검사장 역할로 ‘창크나이트’라는 별명까지 얻었고 “너무 좋은 작품이라 작가한테 ‘시즌2에 점 하나 찍고 나가겠다’ 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응답하라 1988’의 동룡이 아빠, ‘이태원 클라쓰’의 장가 회장 등 극과 극을 오가는 다채로운 변신에 대해선 “역할에 계속 욕심이 났다”면서 “누구나 다 가진 결핍감, 불안감을 통해 캐릭터를 표현하는 편인데 그걸 시청자들이 알아봐 주시는 것 같다”고 돌아봤다.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시작해 100여편 이상 무대에 서면서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겠다 생각한 적도 없다. 창복의 생이 그렇듯 나 역시 우연히 이렇게 왔다. 잘 생겼다고 생각하진 않지만(웃음) 진한 생김새가 아니라서 야비한 경찰(‘나를 찾아줘’의 홍 경장)부터 평범한 동네 아저씨까지 두루 안 튀게 쓰이는 것 같다. 배우는 공식적으로 가면을 쓰는 사람인데. 이창준과 창복 모두 나 자신과 그 역할의 경계에서 매력을 주려 했다.”
 
영화는 정교하게 ‘엉망진창’인 태인의 집과 아이들의 꾸밈 없는 색채놀이 등 꼼꼼한 디테일로 남성풍 느와르와 사뭇 다른 범죄자 이야기를 빚어냈다. 대담한 장르 전복 영화로 비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비틀어진 성장물로 구상했다”는 게 홍 감독의 설명. 애초 생각한 제목은 ‘소리도 없이 괴물이 된다’ 였다고. “선악의 판단을 유보한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담고 싶었다”는 38세 감독은 “유재명·유아인이라는 스타 배우들과 작업한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행복하게 웃었다. 통일된 한반도의 근미래를 그린 SF ‘서식지’로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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