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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칼럼니스트의 눈] 청년들의 이데올로기는 공정

중앙일보 2020.10.13 00:17 종합 20면 지면보기

청년정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제1회 청년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제1회 청년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1회 청년의 날인 지난달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식 연설에서 ‘공정’이라는 단어를 37번이나 언급했다. 그만큼 청년들에게 공정이 중요한 가치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감동 못 준 대통령의 공정 연설
국민은 성과보다 태도 보고 판단
내로남불식 불공정 대처에 실망
청년들이 주축 돼 공정 찾아야

오늘의 청년들에게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보수나 진보가 아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다름 아닌 공정(公正)이다. 지난달 말 실시된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 20대가 34%로 가장 낮았다. 20대가 이른바 진보 정권을 가장 싫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권이 공정하다고 믿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수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보수 역시 공정과 거리가 멀다.
 
공정을 강조한 대통령의 연설은 그러나 공허하다는 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국·윤미향·추미애 등 여권 인사들의 불공정 비리 의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결코 공정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던 대통령이 말로만 공정을 강조한다고 힘이 실릴 수 없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조국·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세워놓고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공정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다”며 거세게 비판했다.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도 “정부가 청년들이 느끼는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도 이런 비판이 나올 것을 의식했는지, 연설문에 여권의 불공정에 대해 에두른 표현을 담기도 했다.
 
“여전히 불공정하다는 청년들의 분노를 듣습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 같은 불공정의 사례들을 봅니다.”
 
그리고는 변명성 발언을 이어갔다.
 
“공정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불공정도 있었습니다. ‘제도 속의 불공정’, ‘관성화된 특혜’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조국 전 법무장관 자녀의 입시비리의혹,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황제 휴가’ 의혹이 제도적 결함이나 관행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들리는 대목이다.
 
“때로는 하나의 공정이 다른 불공정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해소하는 일이 한편에서는 기회의 문을 닫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또 다른 불공정을 초래해 청년들에게 상처를 입힌 데 대한 변명 말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인국공 사태(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요원의 정규직화)’ 말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이 무엇보다도 공정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아는 대로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확대되면서 굳어진 ‘기회의 불평등’을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꼭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이후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겪고 있는 증세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경제교사였던 앨런 크루거 전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는 부(富)의 불평등 문제를 부모와 자녀의 키에 비유했었다. “소득 하위 10% 가구에서 태어난 사람이 상위 10% 계층으로 올라갈 확률은 키가 170㎝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신장이 185㎝까지 자랄 확률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이 클수록 세대 간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크루거는 이 같은 결과를 ‘위대한 개츠비 곡선’으로 표현해냈다.
 
개츠비 곡선은 미국 사회의 그림자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 하위 10% 계층이 평균소득 계층에 진입하는데 5세대(150년)가 걸렸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기득권층의 ‘스펙 품앗이’가 존재한다. 조국 사태에서 보듯 교수나 변호사, 기업 임원 등 기득권층이 자녀들의 스펙 쌓기 기회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기회 제공을 넘어 거짓으로 꾸며내기까지 하는 이 스펙 품앗이는 이미 끊어진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아예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이다.
 
청년들은 취임식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호기롭게 외친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타파해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조국· 추미애 사태에서 드러난 불공정 고리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정부가 보인 ‘내로남불’ 태도를 보며 절망하고 만 것이다.
 
조지프 나이가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Why People Don’t Trust Government?)』에서 “국민이 정부를 평가할 때 대체로 성과를 보지만 더욱 중요시하는 건 어떤 이슈가 터졌을 때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라고 말한 게 다른 뜻이 아니다.
 
현 정부를 보면서 공정이 꼭 진보의 가치는 아니라는 게 명백해졌다. 조지 레이코프는 “공정은 보수와 진보가 함께 쓰는 이중개념이며 공정이 평등과 만났을 때 진보 개념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정부는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와 ‘천룡인(天龍人·일본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창조주의 후예인 세계귀족)’을 구별하고 있다.
 
이른바 진보라는 운동권 586들은 이미 기득권층이 돼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 확대하려 애쓴다. 그런 의미에서는 보수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념에는 관심이 없고 실용주의적 가치를 추구하고 열린 사고를 하는 청년들이 이 사회를 이끌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이유다.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게 아니다. 기득권층에 올라선 진보세력이 입으로는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과거 수구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변화와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만 젊다고 생각까지 젊고 활력 있는 건 아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당들의 청년조직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 역시 기득권에 함몰된 우리네 정치판이 청년들을 “늙은 정당의 주름살을 가려주는 비비크림” (강준만) 정도로만 생각하고 소비하는 데서 기인한다. 젊은 정치인들이 주축이 되는 시스템에서는 그런 ‘애늙은이’청년들은 자체 정화가 되고 만다. 이 사회가 청년들의 이데올로기인 공정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다 vs 나면 안 된다
‘가붕개’란 말은 “모두가 용이 될 순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는 조국 전 법무장관의 트위터 선언에서 비롯됐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들이 결국 신분 상승을 위해서라면 범법행위도 마다치 않던 출세 지상주의의 화신들이었던 사례를 신물 나게 봐오지 않았나. 하늘로 날아오른 용들이 자신의 출생지였던 개천을 비웃으며 거기 남아있는 가붕개들에게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스스로 만들어낸 특권을 향유하는 경우 말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책을 쓴 이유도 그것이었다. 강 교수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더불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 방식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극복하지 않고는 오늘날의 지역 불균형, 학벌과 스펙에 따른 과도한 임금 격차,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용과 미꾸라지를 구분해 차별하는 신분 서열제를 깨고, 개천 죽이기를 중단해 개천을 우리의 꿈과 희망을 펼칠 무대로 삼자”는 게 강 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조 전 장관 말의 의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 전 장관이 오해를 사고 비판을 받았던 것은 (강 교수도 책 제목만으로 오해를 샀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가(또는 그의 아내가) 자녀를 위해 한 ‘스펙 품앗이’는 결코 가붕개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는 용으로 살 테니 너희는 그냥 개천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식의, 용과 가붕개의 신분 차이를 철저하게 고착화하는 것이다.
 
강 교수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오직 자신과 제 가족밖에 모르는 엘리트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고 단언한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는 젊은 세대가 분노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것은 청년들의 이데올로기인 공정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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