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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공무원 총 맞고 불태워졌는데…‘사망 사건’으로 말 바꾼 정부

중앙일보 2020.10.13 00:02 종합 12면 지면보기
총에 맞아 숨졌다.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런데 ‘피살 사건’이 아니라 ‘사망 사건’이란다.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가 북한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일을 한국 정부가 그렇게 불렀다.
 

사건 발생 직후엔 “북한 총격 살해”
김정은 통지문 후 총격·살해 대신
‘서해상 우리 국민 사망 사건’ 규정
“북한의 가해 사실 축소하나” 지적

청와대, 통일부, 국방부는 11일 북한의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며 이씨 사건과 관련해 북한이 공동조사 제안에 응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복사해 붙이기라도 한 듯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표현을 썼다. “서해 상 우리 국민 사망 사건”이라고 말이다. ‘북한군에 의해’라는 가해 주체도, ‘총격을 가해 사살’이라는 이씨를 사망에 이르게 한 방법도 정부 입장에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건 발생 직후인 9월24일만 해도 서주석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총격으로 살해했다”고 했다. 같은날 통일부와 국방부도 “북한이 우리 국민에 총격을 가하고 시신을 불태웠다”며 각기 “반인륜적 행위”와 “만행”으로 규정하고 규탄했다.
 
하지만 9월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 결과를 발표하며 서주석 차장은 사건의 구체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은 채 “남과 북이 각각 파악한 ‘사건’ 경위”라고만 했다. 이후 두 차례 열린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9월 29일, 10월 8일) 결과 보도자료는 모두 “서해 상에서 사망한 우리 국민”이라고 썼다. 그러다 11일 청와대, 통일부, 국방부가 일제히 “서해 상 우리 국민 사망 사건”으로 명칭을 통일한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 북한군이 이씨를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는 국방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유지됐다. 북한에 의한 피살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변한 것은 9월 25일 북한 통일전선부가 ‘김정은 동지의 미안함’을 담은 통지문을 청와대에 보냈다는 사실 뿐이다. 심지어 통지문에서 북한조차도 이씨에게 총을 쏜 사실 자체는 인정했는데, 공교롭게도 이후 정부 입장문에서 ‘총격’이나 ‘살해’같은 단어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정부가 자국민이 희생된 사안에서조차 남북관계 개선을 더 중심에 두고 접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김홍균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사망 사건’이란 명칭 자체가 북한의 가해 사실을 축소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남북관계도 중요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미 그를 넘어 유엔이 들여다보는 국제적 인권 문제가 됐는데, 한국 정부가 자국민이 희생됐는데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망 사건이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명칭은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명칭이 본질까지 규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A씨를 ‘피해자’로 부를 것인지, ‘피해호소인’으로 부를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 깨닫지 않았는가.
 
북한 인권 문제에 정통한 한 법조계 인사는 “아직 경위가 명명백백히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자국민 보호 책임이 있는 국가가 먼저 이를 ‘사망 사건’으로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북한에 유리한 해석을 해주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자연사도, 교통사고도 사망 사건으로 부르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또 “북한이 공동조사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만큼 우리 정부의 자료만 갖고서라도 독자적으로 조사해 국민에 사건 경위를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지혜 국제외교안보에디터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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