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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33화. RPG

중앙일보 2020.10.12 09:00
내 분신 같은 캐릭터 만들었다면 모험의 세계로 출발

RPG는 우리에게 환상계를 체험하고 모험하는 기회를 준다. 영화 ‘쥬만지: 넥스트 레벨’ 주인공들은 RPG처럼 캐릭터를 부여받고 쥬만지 게임속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목숨을 건 미션을 수행한다.

RPG는 우리에게 환상계를 체험하고 모험하는 기회를 준다. 영화 ‘쥬만지: 넥스트 레벨’ 주인공들은 RPG처럼 캐릭터를 부여받고 쥬만지 게임속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목숨을 건 미션을 수행한다.

일찍이 환상계를 꿈꾼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구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 그가 만든 언어를 쓰고, 그가 상상한 종족들이 살아가는 환상계를 보고 싶었던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를 만들어 환상계를 여행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글로 옮겼죠. 그의 환상계 여행기는 수많은 이에게 꿈을 전하고, “나도 환상계를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했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만의 환상계와 그 세계의 모험담을 글로, 또는 그림이나 영화로 펼쳐냈죠. 그중 조금 특이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진행하는 이야기보다는 정말로 그 세계에서 모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시련이 눈앞에 펼쳐지고, 고민 끝에 길을 선택하면서 나아가는 모험. 때로는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거나, 패배할 수 있는 모험.
 
이를 위해선 만든 사람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진행될 필요가 있었죠. 고민 끝에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보드게임의 규칙을 가져옵니다. 주사위를 굴려서 승패를 가르는 규칙 말이죠. 적을 만나면 전투가 벌어지지만, 그 결과는 제작자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사위로 결정되기 때문이죠. 심지어 어떤 적이 나타날지조차 주사위로 정할 수 있어요. 그리고 게임을 관리하는 마스터와 게임을 진행하는 플레이어를 나누었죠. 이야기의 상황은 마스터만 알고 있지만, 그조차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여러 명이 되면 더욱 복잡해지죠. 그리하여 여러 플레이어가 자신의 분신 캐릭터의 역할(Role)을 맡아 즐기는(Playing) 작품,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RPG)이 탄생합니다.
 
최초의 RPG는 컴퓨터가 아니라 종이와 연필, 그리고 주사위를 이용해 테이블 위에서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플레이어가 테이블에 둘러앉고, 마스터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상황을 설명합니다. 가령 마스터가 “여러분은 홀처럼 보이는 안락한 구멍에 있습니다. 동쪽에는 크고 둥근 녹색 문이 보입니다. 여러분 앞에는 나무 상자가 있고, 신기한 지도를 든 마법사 간달프가 보입니다. 간달프가 여러분에게 지도를 줍니다”라며 여러분이 어떻게 할지 묻는 것이죠. 여러분의 결정에 따라 모험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바로 출발할 수도 있고, 또는 하룻밤 푹 쉬고 다음 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거기에선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릅니다. 때로는 결말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가는 여정은 자유롭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마음대로 결정하여 도전할 수 있는 모험, 다채로운 환상계의 여정이 기다립니다.
 
마스터·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라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말이나 약간의 그림으로만 상황을 알 수 있는 만큼 환상계에 대한 상상은 더욱 커지게 되죠. RPG를 즐긴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각색해 소설이나 만화로 소개하기도 했죠. 일본에서 판타지 소설의 시작을 알린 『로도스도 전기』나 한국의 판타지 소설 대표작 『드래곤 라자』는 RPG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으며, 지금도 판타지 게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 계속 탄생하고 있죠. 테이블 위에서 시작된 RPG의 여정은 컴퓨터로 옮겨져 발전합니다. 비록 여럿이 함께 즐기는 방식은 아니었고, 자유도도 낮아졌지만, 캐릭터를 직접 조종하며 진행하는 모험은 테이블 위의 그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거창했으며, 무엇보다도 실감 났습니다. 컴퓨터 통신이 등장하면서 RPG 세계는 더욱 넓어졌습니다. 수많은 이가 하나의 환상계에 뛰어들어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쳐내기 시작했으니까요. 세계 각지에서 수십 명이 거대한 용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수백 명의 전사가 검과 마법을 휘두르며 전장을 질주합니다. 그중에는 불치병에 시달리는 환자나,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RPG라는 환상계 속에선 모두가 전사이자 마법사, 그리고 위대한 모험가가 될 수 있었죠.
 
『호빗』과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톨킨은 판타지를 ‘도피의 문학’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실에 지친 사람들이 환상계로 피하여 쉴 수 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RPG를 통해 환상계는 휴식만이 아니라, ‘도전과 모험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RPG는 우리에게 끝없이 시련에 도전하고 이를 극복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대한 모험을 마치고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될 수도 있죠. 그러한 성취감은 현실에 지친 우리에게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입니다. RPG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넘어 수많은 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또 하나의 환상계이기도 하죠. 코로나19와 온갖 문제로 힘겨운 시간…. RPG라는 환상계에 뛰어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실패할 수 있는 여정.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그 시련은 우리의 마음을 단련시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발견과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환상계를 향한 꿈’을 더욱 키워줄 테니까요.
 
 
 
 

글=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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