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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화의 생활건축] 청와대는 왜 외따로 있을까

중앙일보 2020.10.11 00:04 종합 22면 지면보기
한은화 경제정책팀 기자

한은화 경제정책팀 기자

개천절이었던 10월 3일, 광화문 광장 일대는 차벽으로 봉쇄됐다. 광장과 세종대로를 둘러싸고 경찰 버스가 사람 지나갈 틈 없이 주차됐다. 태평로 어느 고층 건물에서 세종대로의 차벽을 찍은 사진 중에는 광화문 너머 멀리 청와대가 보였다. 북악산 기슭, 높은 곳에 자리한 청와대에서는 한강까지 훤히 보인다고 한다. 이날 청와대에서 본 광장의 차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어쩌다 산기슭 높은 곳에 청와대가 자리 잡게 됐을까.
 
청와대가 있는 자리는 원래 경복궁의 영역이었다. 경복궁의 후원이었던 이 터에 고종은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전각을 지었다. 고종 5년인 1868년, 임진왜란으로 전소한 경복궁을 복구하면서 고종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운 미션을 부여했다. 조선의 국가 운영의 기본원칙과도 같은 문과와 무과를 융성하게 해라. 즉 인재를 뽑는 장소로 썼다. 과거시험을 치르거나 무술대회를 열었다. 현재 청와대 상춘재와 녹지원이 있는 자리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고종은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는 자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개천절 광화문 차벽과 청와대의 모습. [뉴스1]

개천절 광화문 차벽과 청와대의 모습. [뉴스1]

하지만 고종의 뜻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의 전각 대다수가 철거돼 팔려나갔다. 일제는 궁 안에 식민통치를 위한 조선총독부를 지었다. 융문당과 융무당을 비롯한 후원 일대의 전각도 철거됐고 총독관사가 들어섰다. 원래 남산에 있다가 궁 내로 들어왔다. 결국 경복궁 앞에는 청사가, 뒤에는 총독관사가 들어섰다. 1945년 해방 이후 총독관사는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됐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가 됐다. 외세 침탈의 상징과도 같은 총독관사는 90년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새 관저와 본관을 짓기까지 대통령의 집무실로 계속 쓰였다.
  
청와대라는 명칭 관련 논란도 있다. 격 높은 건물에 청기와를 쓴 전통이 있다 하여 청와대가 됐다는 것과 옛 총독관저의 지붕에 청기와가 얹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일제 잔재의 명칭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집무공간이 국민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곳이 없다. 청와대가 도시 중심부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총리관저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시내 한복판에 있듯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당선되기 전부터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청와대가 과거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상징이었기에 국민 속에 있는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도 했다. 하지만 백지화됐다. 그리고 소통의 상징이던 광장은 차벽으로 닫혔다. 개천절에는 청와대 가는 길목마다 경찰이 검문하기도 했다. 2020년의 청와대는 더 외따로, 멀리 있다.
 
한은화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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