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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귀농인 성지’로 통하는 남원의 이 절

중앙일보 2020.10.10 15:00

[더,오래] 김성주의 귀농귀촌이야기(80)

전라북도 남원의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때 증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귀국해서 세웠다고 전해진다. 1200년이나 오래되고 유서 깊어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절이다. 지리산과 덕유산 자락 사이에 있어 남원을 거쳐 지리산을 오르려면 실상사를 꼭 지나가게 마련이다. 다리 건너에 있기에 일부러 들어가지 않으면 내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름은 들어 봤지만 속은 잘 모른다.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은 실상사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남원의 실상사는 귀농·귀촌인에게는 ‘성지’다. 적어도 남원에서 귀농·귀촌은 실상사가 만들어 왔다.
 
실상사가 귀농·귀촌과 지역사회 풀뿌리 문화의 중심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도법 스님 덕분이다. 도법 스님은 1995년부터 실상사 주지를 맡았고, 인간화 생명 살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1998년 실상사 소유의 땅 3만 평을 내놓고 귀농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지리산 아랫녘 평지에 있는 실상사. 남원의 실상사는 귀농·귀촌인에게는 ‘성지’다. 실상사가 귀농·귀촌과 지역사회 풀뿌리 문화의 중심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도법 스님 덕분이다. [사진 김성주]

지리산 아랫녘 평지에 있는 실상사. 남원의 실상사는 귀농·귀촌인에게는 ‘성지’다. 실상사가 귀농·귀촌과 지역사회 풀뿌리 문화의 중심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도법 스님 덕분이다. [사진 김성주]

 
1999년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하면서 귀농운동 차원을 넘어 생활협동조합, 대안교육, 환경연대 운동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최근에는 『붓다, 중도로 살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도법 스님이 좋아 출가했다는 용묵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절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실상사는 지리산 아랫녘 평지에 있다. 대개의 절이 산중에 자리 잡아 오르기가 만만찮으나 실상사만큼은 논과 밭과 같은 평지에 있으니 예전부터 중생과 함께 하는 절이었다. 도법 스님은 실상사에 있으면서 절이 자리한 산내면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당시 산내면 주민은 화전민 수준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로 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마을 발전을 위해 생각해 낸 것이 절이라는 공간을 통해 마을 주민과의 화합을 통해 발전 사업을 벌이고, 귀농·귀촌인을 받아 마을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지금의 표현으로는 ‘마을발전 사업’, ‘도시재생 사업’, ‘귀농·귀촌 사업’이라고 하겠다. 절에서 교육하고 마을 공동 사업을 추진하면서 실상사 귀농학교를 열어 뜻있는 도시인을 불러 모아 살도록 하였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실천했다. 절에서 모이지만 불교를 내세우지 않았다. 누구나 도량으로 들어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대개의 절이 산중에 자리 잡아 오르기가 만만찮으나 실상사만큼은 논과 밭과 같은 평지에 있으니 예전부터 중생과 함께 하는 절이었다. [사진 김성주]

대개의 절이 산중에 자리 잡아 오르기가 만만찮으나 실상사만큼은 논과 밭과 같은 평지에 있으니 예전부터 중생과 함께 하는 절이었다. [사진 김성주]

 
지금도 실상사에 가면 입구에 협동조합 공판장이 보이고 절 안 경당에서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눈다. 템플 스테이가 있어 조용히 머무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뜰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다. 한참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전통 시장을 연상시킨다. 수십 년 전에 시작한 귀농·귀촌 프로젝트는 외지인과 토박이가 한데 어울려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자그마한 산내면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식당과 카페가 있는 시가지가 형성된 것은 실상사 덕분이다. 산내면 주민은 조용하지만 활기차게 살고 있다.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는 곳이다. 실상사에 가면 용묵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에게 귀농·귀촌의 삶에 관해 물어보시라.
 
실상사처럼 현실 세계와 함께 하는 곳이 어디 있나 찾아보니 남원에서 가까운 임실에 또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임실 치즈 마을이다. 임실 치즈 마을은 마을 이름처럼 치즈로 유명하다. 낙농업을 하며 우유와 함께 치즈를 만든다. 마을 옆에는 ‘임실 치즈 테마파크’가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치즈는 임실의 대표 농산물이다. 임실군청에서는 회의 참석자에게 반드시 요거트를 준다. 걸쭉하고 달달한 요거트 한잔을 마셔야만 회의가 잘 된다. 그 맛에 임실군이 부르면 일부러 가기도 했다. 한번은 요거트를 안 주고 녹차를 주길래 속으로 요즈음 임실 젖소에 무슨 일이 있나 섭섭해한 적도 있다. 아무튼 임실군은 치즈가 먹여 살린다.
 
임실이 치즈로 유명하게 된 것은 지정환 신부 덕이다. 그는 벨기에 사람이다. 1931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고 1959년 한국에 천주교 전구교구 소속으로 입국해 1964년 임실 성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당시 임실군 농민의 생활은 궁핍했다. 그 모습을 본 지 신부가 농민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치즈였다. 벨기에 고향에서 낙농업은 괜찮은 소득 사업이었다.
 
1967년 5월 23일. 벨기에에 계신 부모를 설득해 2000달러를 받아와 임실군에 대한민국 최초로 치즈 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생각보다 치즈가 잘 나오지 않아 고전했다고 한다. 지 신부는 임실의 가톨릭 신자와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해 치즈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고, 1969년에야 최초로 치즈 생산에 성공하게 된다. 그 후 임실에서 생산된 치즈는 서울의 특급 호텔, 외국인 전용 상점에 납품하는 등 유통망을 전국으로 확장했다. 임실 치즈 공장이 주민 협동조합으로 개편되면서 지 신부는 임실 치즈 공장의 운영권과 소유권을 주민 협동조합에 양도한다. 그때부터 임실 치즈는 임실의 특산물이 된 것이다.
 
임실이 치즈로 유명하게 된 것은 지정환 신부 덕이다. 벨기에에 계신 부모를 설득해 2000달러를 받아와 임실군에 대한민국 최초로 치즈 공장을 설립했다. [사진 임실군]

임실이 치즈로 유명하게 된 것은 지정환 신부 덕이다. 벨기에에 계신 부모를 설득해 2000달러를 받아와 임실군에 대한민국 최초로 치즈 공장을 설립했다. [사진 임실군]

 
지정환 신부는 한국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1970년대에는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 사제, 선교사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시위 도중 경찰에 체포돼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농촌 발전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치즈 생산을 통해 농촌 발전에 헌신한 신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추방을 면했다고 한다. 1980년에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우유배달 트럭을 몰고 광주를 직접 방문해 시민군에게 우유를 제공하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임실군 주민들에게 지정환 신부에 관해 물어보니 ‘들어 올 때는 네 바퀴였는데 나갈 때는 두 바퀴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이라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지 신부가 처음 임실에 부임했을 때 지금도 꽤 값나가는 사륜구동 지프차를 몰고 왔다고 한다. 네 바퀴 자동차를 몰고 온 외국 신부의 모습이 너무나 멋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농민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불철주야 일하면서 노심초사하더니 치즈를 만들어 마을을 일으켜 세웠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다 내주었단다. 그리고 건강이 나빠져 임실을 떠날 때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었단다.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증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들어 올 때는 네 바퀴이고, 나갈 때는 두 바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지정환 신부는 2019년 4월 13일 돌아가셔 전주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됐다. 이 가을 혹시나 전북을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 임실 치즈마을, 남원 실상사를 들러보길 추천한다.
 
주말이면 도시든 시골이든 교회와 성당, 절에 사람이 모인다. 왜 종교를 가졌는지 사연이 제각각이겠지만 기도를 하며 바라는 것은 같을 것이다. ‘나와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도법 스님과 지정환 신부같이 남을 위해 희생한 종교인이 그리운 오늘이다.
 
슬로우빌리지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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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필진

[김성주의 귀농귀촌이야기] 농촌이나 어촌에서 경험한 아름다운 기억을 잊지 못해 귀농·귀촌을 지르는 사람이 많다. “나는 원래 농촌 체질인가 봐”라며 땅 사고 집도 지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후회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귀농·귀촌은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녹록지 않다. 필자는 현역 때 출장 간 시골 마을 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리워 귀농·귀촌을 결심한 농촌관광 컨설턴트다. 그러나 준비만 12년째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준비한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정착한다고 했다. 귀농·귀촌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통해 정착 요령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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