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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프리즘] 세종대왕도 걱정할 도서정가 소동

중앙선데이 2020.10.10 00:26 706호 31면 지면보기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세종대왕도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마침 가갸날(한글날)인데 말이다. 동떨어진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노벨문학상도 마찬가지. 이래선 언제 우리 작가에게 차례가 오나 싶다. 도서정가제(도정제) 개편을 둘러싼 요즘 소동이 그렇다는 얘기다. 세종대왕 입장에서는 도정제를 둘러싼 후손들의 소동이 달가울 리 없다. 좋은 책 만들라고 최고의 문자를 선물했는데 말이다. 도정제가 무너져, 이를 옹호하는 출판인들의 주장대로, 우리 출판 풍토가 허약해진다면 그만큼 노벨상급 문학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찬반 다툼 속에 차분한 논의 실종
출판유통 전산망 첫 단추는 다행

이런 진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도정제 수호 혹은 폐지를 주장하는 달뜬 목소리들 가운데 차분한 계산, 장기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정제 재검토!” 정부가 먼저 때리니까 “진짜 이러기냐!”, 출판계가 맞받아치는 형국이다.
 
책 정가를 인위적으로 고정시키는 도정제가 그렇게 좋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완전정가제 논의는 왜 진지하게 시작하지 않나. 책값 할인을 전면 금지하는 궁극의 정가제도 말이다(현행 도정제는 책 정가의 최대 15% 할인을 허용한다). 그렇게 되면 대형 온라인 서점과 지방의 동네책방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다(지금은 그렇게 못한다는 걸 1분만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우리 출판계는 역시 각자도생인 것 같다. 식민·전쟁을 경험한 한국인의 보편적인 삶의 형식으로 지적되곤 하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기’ 말이다. 중소형 출판사들만 도정제 수호를 외칠 뿐, 대형 출판사들이 목소리를 보탰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어봤다. 도정제를 철폐하든 완전정가제를 실시하든 어쨌든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대형 출판사들은 이런 계산속인 건 아닌가.
 
도정제의 좋은 점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과연 만능인가, 싶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최대 장점으로 꼽히는 출판 다양성이 도정제로 인해 몇 년간 유지된 결과 한국의 단행본 종수는 한해 8만 종이 넘는다. 가뜩이나 독서율이 떨어지는 마당에 출판 다양성이 만능키는 아니다. 8만 종의 새 책들은 기후 변화 시대에 그만큼의 목재 소비를 뜻한다.
 
이런 지적에 의미가 없지 않다면 도정제 소동 속에 관련 논의를 끼워 넣을 수 있으면 좋겠다.
 
도정제로 시끄러운 이면에 의미 있는 변화도 생긴다. 지난달 18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원장 김수영)이 출판유통 공룡 3사, 그러니까 교보·예스24·알라딘과 출판유통통합전산망 구축에 합의했다. 통합전산망은 1990년대 중반부터 출판계의 숙원사업이었다. 이게 없어서 서점 따로 도서관 따로 서지사항 등 책 관련 정보(메타데이터)가 제각각이었고, 어떤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유통 공룡들의 전향적인 결정으로 25년 내 어느 때보다 통합전산망 성사 가능성이 커졌다. 출판 유통 전문가들은 환영 일색이다. 정착되면 정확한 판매 자료를 바탕으로 보다 합리적인 출간 계획, 출판 정책을 시도할 수 있다. 싸움 양상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도정제 소동에 비하면 확실히 장기적이고 차분한 사업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전산망 안으로 당연히 들어와야 할 일부 중소형 서점들의 반응이 미온적이다. 경북 구미의 중형서점인 삼일문고 김기중 대표는 “통합전산망의 취지에는 100% 동의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민간 기업의 판매 관리 시스템(포스)을 채택해 잘 쓰고 있는데 굳이 진흥원의 전산망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얘기다. 이런 거부감 혹은 우려를 달래는 게 전산망의 1차 관문인 것 같다. 도정제든 전산망이든 잘 정착되면 좋겠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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