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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옥탑방서 신혼살림 한묵, 바게트 하나로 유쾌한 삶

중앙선데이 2020.10.10 00:20 706호 26면 지면보기

예술가의 한끼

1974년 프랑스 파리의 아틀리에17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한묵. [사진 갤러리현대]

1974년 프랑스 파리의 아틀리에17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한묵. [사진 갤러리현대]

이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모습으로 한세기를 넘게 살다간 사나이가 있었다. 한묵(1914-2016)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10대 말에 만주로 가서 미술공부를 한 후, 20대 초반에는 동경으로 가서 가와바타(川端)미술학교를 다녔다. 해방 일년 전에 금강산이 가까운 고성에서 살며 중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이때 원산의 이중섭(1916-1956)과 교유를 텄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왔다. 피란지 부산에서 박고석(1917-2002)을 알게 되어 이 셋은 의기투합하였다.
 

피란지 부산 판잣집서도 풍류
홍대 교수 땐 천경자 집밥 즐겨

48세에 파리행, 60대 중반 결혼
옥탑방 화실엔 앉은뱅이 책상뿐

69년 달 착륙 이후 추상화 개척
냉면 한 그릇도 소주 음미하듯

한묵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판자들을 모아 못질을 하여 이어붙였다. 보수동 산비탈에 어설픈 판잣집 하나가 세워졌다. 당호는 통풍장(通風莊)이다. 엉성한 문짝을 비집고 들어오는 태평양의 겨울 바닷바람이 무척 매서웠으나 오히려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는 기분 좋은 집이라고 우겼다. 한묵은 아무리 우울한 상황이 닥쳐도 즐겁게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피란시절 이중섭·박고석과 의기투합
 
한묵(오른쪽)이 1952년 부산 피란 시절 이중섭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사진 갤러리현대]

한묵(오른쪽)이 1952년 부산 피란 시절 이중섭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사진 갤러리현대]

한묵의 일생이 그랬다. 곤궁한 삶 속에서 구김이 전혀 없었다. 생래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통풍장의 바람처럼, 인습, 체면, 명성, 미련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의 바람으로 평생을 살았다.
 
종군화가를 하며 월간지 사상계 등에 삽화를 그려가며 피란지의 생활을 유지했다. 1953년 서울로 환도했다. 1955년, 정릉에서 이중섭, 박고석과 뭉쳐 1년 남짓 함께 살았다.  
 
1956년 어느 날, 이중섭이 박고석의 집에 와서 종이 위에 유채로 몇 장의 그림을 그렸다. 눈 내리는 날, 소년이 광주리를 이고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풍경이었다. 그림을 본 한묵이 뜬금없이 한마디 던졌다. “난 마릴린 먼로가 좋아”. 막걸리의 취기가 오른 남자 셋은 흐뭇한 표정으로 마릴린 먼로를 떠올리며 흥분했다. 그녀가 주연하고 주제가를 부른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이 서울에서 막 상연되었을 때다. 마릴린 먼로는 6.25전쟁 때 위문공연차 한국을 왔었다. 아직 청춘인 이 세 남자의 가슴 속에 그녀가 남긴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그리하여 이중섭의 마지막 작품은 내용과 무연하게 ‘돌아오지 않는 강’이 되어버렸다. 박고석의 부인은 분위기를 깰까 봐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었고.
 
파리에 도착하던 해인 1961년 봄 먼저 도불한 문신(가운데), 남관(뒷쪽)과 센강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한묵(앞쪽). [사진 갤러리현대]

파리에 도착하던 해인 1961년 봄 먼저 도불한 문신(가운데), 남관(뒷쪽)과 센강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한묵(앞쪽). [사진 갤러리현대]

홍익대 교수(1955-61)가 되어서는 서촌에서 살았다. 누상동의 2층이 그의 작업실이자 침실이었다. 근처에는 이봉상, 천경자 등 홍익대 동료 교수들이 살았다. 한묵은 천경자의 집에 가서 전라도식 집밥을 자주 얻어먹었다. 이번에는 당호가 ‘면회 5분’으로 바뀌었다. 먼저 파리로 간 김환기(1913-1974)의 편지를 받다 보니 파리가 더욱 가고 싶어졌다. 파리행의 결기를 ‘면회 5분’으로 압축하여 종이에다 써서 출입문에 붙여놓았다.
 
‘면회 5분’ 작업실에서 그린 그림으로 도불전(渡佛展)을 마친 한묵은 주변의 걱정과 부러움을 안은 채 파리로 떠났다. 1961년, 그의 나이 48세였다. 어제까지는 교수였는데 오늘부터는 접시닦이, 청소 등 잡일을 해가며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의 거처는 오페라가(街)의 6층 옥탑방이었다. 통풍장에 비하면 엄청 좁은 집이었다. 1977년, 60대 중반의 한묵은 드디어 결혼을 했다. 평생의 반려가 된 이충석(1932-)은 서울신문 기자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18세 연하의 부인은 한묵을 흠모하고 존경했다. 세계 제일의 화가, 세계 최고의 남자로 떠받들었다.
 
옥탑방의 살림살이는 곤궁했다. 비키니 옷장 하나가 살림의 전부였다. 사과짝 위에 천을 덮으면 밥상이 되었다. 붓 몇 자루가 놓인 앉은뱅이 책상 위가 아틀리에였다. 오페라가에서 산 바게트 하나로 세상이 환해지는 소박한 삶이었다.
 
한묵은 오페라가에 살았어도 그 유명한 오페라극장을 못 가봤다. 입장료가 만만치 않았다. 1980년 화가 남관(1913-1990)의 부인 화가 신금례가 파리를 방문했다. 남관의 아들 남윤이 표를 넉장 사서 한묵부부와 함께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했다.  
 
오페라가 끝나고 이들은 근처 까페로 향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오페라의 유령 원작소설의 배경이 되는 바로 그 오페라극장에서 뮤지컬을 본 한묵은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갑자기 한묵이 웃으며 스웨터 속에 숨겼던 넥타이를 살짝 꺼내어 보였다. 예전에는 상류층만이 가던 오페라 극장이 아니던가. 혹시라도 복장불량으로 입장불가가 될지 몰라 걱정되어 만만의 준비를 하였다고 실토했다.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한 소년, 한묵이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한묵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작품주제가 우주공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03세까지 명랑함 잃지 않은 ‘소년’
 
한묵의 ‘달마의 콧수염’, 캔버스에 유화, 200x150㎝, 1988. [사진 갤러리현대]

한묵의 ‘달마의 콧수염’, 캔버스에 유화, 200x150㎝, 1988. [사진 갤러리현대]

마침 1968년부터 한묵은 파리의 아틀리에17 판화연구소에서 판화수업을 받고 있었다. 다색판화를 찍기 위해선 색면의 분판(分版)작업이 요구된다. 한묵은 이를 응용하여 하나의 캔버스 안에 공간, 장소, 사건의 레이어를 각각 분리하여 거기에 맞는 조형적 형태들을 찾아서 이를 중층적으로 겹쳐서 페인팅을 완성해나갔다. 장소와 공간을 분리하여 우주를 표현하는 데에 판화작업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1989년, 행운이 찾아왔다. 톰슨(Thomson)사의 공장을 작업실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대작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1990년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한묵의 개인전이 열렸다. 대작들이 출품되었다.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작품을 판 돈으로 반포에 30평 조금 넘는 아파트를 부부 명의로 샀다. 드디어 생애 처음 자신의 집이 생겼다.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다.
 
신이 난 한묵은 자식뻘 되는 서울의 미술인들과 함께 서울의 여기저기를 다녔다. 신촌의 고박사 냉면집에 갔다. “그냥 냉면도 맛있는데, 박사가 만든 냉면이라면 얼마나 맛있을까” 하며 면수에 간장을 타서 마시는 법을 알려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한묵이었다.
 
2012년 서울의 갤러리현대에서 한묵의 백수(白壽 99세)전이 열렸다. 처음으로 그의 서예작품이 함께 전시되었다. 현대미술가가 자신의 본격적인 작품 곁에 서예작품을 함께 거는 일은 거의 없다. 필경 그는 장르의 그물도 통과한 자유로운 바람이 되었다.  
 
서예작품 필연(必然)이라는 자구는 그의 삶을 일관했던 유쾌함과 명랑함이 숙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작은 것이라도 주어진 데서 기쁨을 찾는 지혜에서 나왔음을 알려주었다.
 
한묵은 2016년 파리에서 졸했다. 향년 103세였다. 마지막까지 주름 한 줄 없는 맑은 피부였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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